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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

중앙일보 2021.01.22 00:15 종합 28면 지면보기
이영희 도쿄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도쿄특파원’이란 문패를 달고 기사를 쓰는데도 자주 이런 댓글이 달린다. “아니 얘는 왜 맨날 일본 얘기만 써?” “오늘도 본국 소식 전하느라 바쁜 이모 기자.” 그럼 도쿄에 와서 바이든 대통령 취임 기사를 써야 할까요…잠시 씁쓸해하고 넘어간다. 코로나19 뉴스엔 “그냥 거기서 코로나 걸려 죽어”,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일본 침몰해버려” 이런 반응을 마주할 땐 “인명은 재천”을 되뇌지만 조금 침울해지기도 한다. 하필 이 시국에 일본에 와서 욕만 잔뜩 먹어야 하다니, 한·일 갈등의 피해자 중 하나는 나 같은 특파원들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데 지난주 재일 대한민국민단(민단) 신년 모임에 갔다가 놀라고 말았다.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정말 다들 심란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였고, 한·일관계가 더 악화할 것이란 전망이 쏟아졌다. 희망을 말해야 할 신년사인데, 연단에 선 여건이 민단 단장은 “불안해서 견딜 수 없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한·일관계는 100만 우리 재일교포들에겐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도 했다.
 
2018년 도쿄 도심에서 열린 혐한 시위. [연합뉴스]

2018년 도쿄 도심에서 열린 혐한 시위. [연합뉴스]

‘혐한(嫌韓)’이 하나의 비즈니스가 된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으로 산다는 건 이미 ‘극한체험’처럼 보인다. 코로나19로 조금 줄긴 했지만 수시로 혐한 시위를 마주해야 하고, 서점에는 ‘한국인은 거짓말쟁이’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야’ 류의 제목을 가진 책들이 버젓이 매대에 올라 있다. 어차피 이곳에 살아야 하기에 그런 장면을 남의 일인 양 무덤덤히 넘기는 건 얼마나 감정적으로 지치는 일일지 상상도 어렵다.  
 
민단 사무실에 돌을 던지는 우익들부터 휴대폰으로 한국어 사이트를 보고 있단 이유로 일부러 어깨를 치고 지나는 사람까지 크고 작은 위협도 실존한다. 신년회에서 만난 한 교포는 말했다. “한·일 관계가 안 좋단 뉴스가 나오면 아이들이 먼저 걱정돼요. 혹시 괴롭힘을 당하거나 기가 죽는 건 아닐까 싶어서….”
 
알고 있다. 혐오하는 쪽이 나쁘다는 것, 법과 제도로 막아야 한다는 것도. 재일 한국인의 안위를 위해 일본에 마땅히 해야 할 요구를 하지 말란 거냐, 라고 한다면 물론 그렇지 않다. 단지 권력을 가진 이들이 불필요하게 공격적인 언사로 대립을 부추길 때, “단교 가즈아”라며 일본을 향해 똑같은 혐오를 돌려줄 때, 그 칼끝에 다치는 건 타국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우리와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한 번쯤 떠올리길 바랄 뿐이다. 실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나 자신도 잊지 않기 위해 적어둔다.
 
이영희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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