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해바다 푸른 길, 그 끝엔 붉은 겨울의 맛

중앙일보 2021.01.22 00:03 종합 20면 지면보기
경북 영덕의 길은 하나같이 바다로 나 있거나, 바다와 나란히 누워 있다. 블루로드를 걸었다. 부산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동해안을 잇는 해파랑길의 원조와 같은 길이다. 해안 절벽을 걷다 보면 파도가 수시로 넘나든다. 사진은 영덕 축산항 블루로드 다리.

경북 영덕의 길은 하나같이 바다로 나 있거나, 바다와 나란히 누워 있다. 블루로드를 걸었다. 부산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동해안을 잇는 해파랑길의 원조와 같은 길이다. 해안 절벽을 걷다 보면 파도가 수시로 넘나든다. 사진은 영덕 축산항 블루로드 다리.

겨울이 깊었다. 그러고 보니 올겨울은 겨울 색이 짙다. 여느 겨울보다 눈도 많이 내리고, 바람도 야무지게 맵다. 마음이라도 따뜻하면 좋겠는데, 가슴에 부는 바람이 더 차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길을 나선다. 사람이 붐비는 곳은 피해야겠고,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곳이면 좋겠다.
 

영덕 겨울 여행
770㎞ 해파랑길 원조 블루로드
이문열 소설 속 그 바다 바라보다
마무리 여정은 제철 맞은 대게로

문득 바다가 떠올랐다. 무심히 들고 나는 파도를 온종일 바라봐도 좋고, 붉은 해 떠오르는 새벽 바다에 나가도 좋다. 은빛 윤슬 일렁이는 한낮의 바다도, 바닷바람 모진 모래사장도 좋다. 동해안의 한갓진 겨울 풍경을 그리다 경북 영덕의 블루로드를 떠올렸다. 꼭 10년 전 이맘때 이 길을 걸었었다. 그땐, 사람이 그리워 길 위에 섰다. 지금은, 사람과 떨어지려 길을 걷는다.
  
길 위에서
 
해안 절벽 아래를 걷는 블루로드. 옛날 해안초소를 잇던 길이다.

해안 절벽 아래를 걷는 블루로드. 옛날 해안초소를 잇던 길이다.

해파랑길은 부산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동해안을 잇는 770㎞ 길이의 대형 트레일이다. 이 대장정의 원조가 되는 길이 블루로드다. 2009년 여름 해파랑길 조성 계획을 발표할 때 문체부 담당자가 “동해안에 블루로드 같은 길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던 걸 똑똑히 기억한다.
 
블루로드는 영덕군청이 조성한 길이다. 영덕 해안을 따라 모두 4개 코스를 조성했다. 해파랑길이 이 길을 고스란히 빌려 쓴다. 블루로드 A∼D코스가 해파랑길 19∼22코스다. 하여 이름이 두 개여도 길은 하나다.
 
해맞이공원에서 일출을 감상하는 관광객들.

해맞이공원에서 일출을 감상하는 관광객들.

블루로드의 하이라이트 구간이 B구간, 해파랑길로 치면 21코스다. 창포말등대가 있는 해맞이공원에서 축산항까지 12.8㎞ 길이다. 길은 크게 두 구간으로 나뉜다. 해안도로 옆 인도를 걷는 구간과 옛 해안초소를 잇는 해안절벽 구간. 해안도로가 옛 7번 국도다. 왕복 4차로 신작로가 7번 국도 이름을 가져가면서 20번 지방도로로 이름이 바뀌었다. 해맞이공원에서 대게 원조마을로 유명한 경정 2리까지 이어진다. 경정 2리에서 축산항까지 약 4㎞ 구간이 해안초소길이다. 바다와 바투 붙어 있어 큰 파도가 일면 포말이 튄다. 장담하는데, 이 10리 길은 770㎞ 해파랑길에서 가장 빛나는 구간이다.
 
영덕의 랜드마크 창포말등대를 바다에서 바라봤다.

영덕의 랜드마크 창포말등대를 바다에서 바라봤다.

영덕에 가면 굳이 이정표 찾아다니며 걸을 필요가 없다. 영덕의 길은 모두 바다로 나 있거나, 바다와 나란히 누워 있다. 어느 길을 걸어도 파란 바다가 함께한다.
  
겨울 바다
 
이문열이 1979년 발표한 자전소설 ‘그해 겨울’은 스물한 살 청년의 방랑기다. 이 방랑기와 다른 두 편의 단편을 묶어 이문열 초기 대표작 『젊은 날의 초상』이 완성됐다. 이문열이 국민 작가로 통하던 시절, 수많은 청춘이 ‘그해 겨울’의 청년 영훈처럼, 아니 작가 이문열처럼 혼자 길을 나섰다. 그 길고도 외로운 여정의 끝은 예의 바다였다.
 
해 질 무렵의 대진 해변. 바다는 언제나 청춘을 부른다.

해 질 무렵의 대진 해변. 바다는 언제나 청춘을 부른다.

소설에 나오는 바다가 영덕 대진 해변이다. 대진 해변과 고래불 해변을 묶어 이른바 ‘명사이십리길’이 이어진다. 소설에서 영훈은 작가의 고향인 경북 영양에서 창수령을 넘어 송천을 따라 대진 해변까지 걷는다. 이윽고 바다 앞에 선 영훈은 수첩에 이렇게 적는다. ‘바다, 나는 결국 네게로 왔다. 돌연한 네 부름은 어찌 그렇게도 강렬했던지.’
 
영훈이 바다를 찾아갔던 그해 겨울처럼 올겨울도 유례없는 폭설이 쏟아졌고, 한겨울의 대진 해변은 예나 지금이나 쓸쓸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사장을 서성거리다, 30년 전 영훈처럼 홀로 바다를 찾아온 청년 두어 명을 목격했다. 그들은 각자 백사장에 앉아 한참 바다를 바라보다 툴툴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훈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표를 끊으러 가는 길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다는 여전히 청춘을 부른다. 청춘이 아니어도 바다의 부름은 늘 돌연하고 강렬하다.
 
대게의 계절
 
영덕의 겨울은 대게의 계절이다. 영덕 사람이 대게에 갖는 자부심은 각별하다. 윗마을 울진과 이름을 놓고 시비가 붙은 적도 있고 아랫마을 포항이 지금은 출하량은 더 많지만, 영덕 사람은 “영덕 대게는 맛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영덕은 대게의 고장이다. 특히 박달대게라 불리는 큰 대게가 유명하다. 마침 제철이 시작됐다.

영덕은 대게의 고장이다. 특히 박달대게라 불리는 큰 대게가 유명하다. 마침 제철이 시작됐다.

영덕 대게의 남다른 맛은 나름 근거가 있다. 대게도 큰놈이 맛있는데, 이른바 박달대게라 불리는 큰놈이 주로 영덕 앞바다, 정확히 말해 강구항∼축산항 앞바다에 모여 산다. 대게 어부들이 ‘무화잠’이라 부르는 수심 100∼420m 해저 지형이다(우병철 영덕 어업지도선 선장).
 
박달대게는 그냥 부르는 이름이 아니다. 몸통 길이가 위에서 아래로 9㎝가 넘어야 박달대게라 한다. 박달대게는 수협에서 집게다리에 하얀 딱지를 붙여 표시한다. 비싸다. 1마리에 10만원이 훌쩍 넘는다. 올해는 작황이 좋지 않아 가격이 더 올랐다. 지난 13일까지 대게 어획량이 작년 같은 기간보다 20% 가까이 줄었다(강구수협 윤상필 판매과장).
 
대게는 겨울에만 먹을 수 있다. 6월부터 11월까지 대게 연안 조업이 금지된다. 1월 하순이니 이제 살이 차올랐을 때다. 겨울 영덕에 가면, 아무리 비싸도 대게는 먹어야 한다. 서울의 수산시장은 기대를 접는 게 현명하다. 영덕 대게는 거의 대부분 영덕에서 소비된다. 영덕에서도 없어서 못 판다.  
 
영덕지도

영덕지도

영덕=글·사진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