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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서 울려퍼진 '고래 호소'…판사는 판결문 6장 할애했다

중앙일보 2021.01.19 05:00
지난해 6월 9일 오후 울산시 동구 방어진수협위판장 앞에 인양된 밍크고래 사체 모습. 고래 몸통에 불법 포획단이 쏜 것으로 보이는 작살 여러 개가 꽂혀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6월 9일 오후 울산시 동구 방어진수협위판장 앞에 인양된 밍크고래 사체 모습. 고래 몸통에 불법 포획단이 쏜 것으로 보이는 작살 여러 개가 꽂혀 있다. 연합뉴스

작살 쏜 뒤 ‘고래 실혈사(失血死)’ 기다려

“고래가 지구 상에서 사라진다면 인간 역시 지구 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
 

[이슈추적]
울산지법 유정우 판사, 불법포획 일당에 실형

 울산지법 형사2부 유정우 판사가 최근 밍크고래 불법포획과 관련한 재판에서 판결문 마지막에 언급한 내용이다. 유 판사는 이 재판의 판결문 26장 중 6장을 할애해 고래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18일 울산지법에 따르면 유 판사는 밍크고래를 불법 포획한 혐의(수산업법 위반) 등으로 기소된 일당에 대해 지난 15일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에 넘겨진 선장 A씨에게 징역 2년, 다른 선장 B씨에게 징역 1년 3개월을 선고했다. 또 C씨 등 선원 6명에게는 징역 8개월에서 1년 6개월을 각각 선고했다.
 

“고래 가둔 뒤 작살 꽂아…잔혹한 범행”

 
불법 포획된 것으로 의심되는 밍크고래가 지난해 6월 9일 발견돼 육지로 이송됐다. [사진 울산해경]

불법 포획된 것으로 의심되는 밍크고래가 지난해 6월 9일 발견돼 육지로 이송됐다. [사진 울산해경]

 조사 결과 A씨 등은 지난해 6월 8일 경북 포항 구룡포항에서 어선 2척에 나눠 타고 출항했다. 배에는 조업 장비 대신 고래 포획 도구를 실었다.  
 
 이들은 울산 쪽으로 남하하던 중인 이날 오전 11시쯤 울산 울주군 간절곶 남동방 18.5해리 해상에서 유영 중인 밍크고래 2마리를 발견했다. 선원들은 선장의 지시에 따라 배 한 척은 고래를 몰고, 다른 한 척은 고래의 퇴로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고래를 가둔 뒤 작살을 쐈다.
 
 이후 이들은 작살과 연결된 로프를 이용해 고래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피를 많이 흘린 고래가 실혈사(失血死)하길 기다리는 작업이었다. 마침내 이들은 고래가 죽자, 선상에 끌어올렸다. 이날 잡아올린 밍크고래 2마리는 마리당 시가 7000만~ 8000만원 상당이다. 
 
 A씨 등은 재판 과정에서 “바다에 죽어 있는 밍크고래를 합법적으로 건져 올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밍크고래를 발견했을 당시 고래를 둘러쌌던 어선 항적과 촬영된 영상 등을 토대로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울산지법에 따르면 밍크고래를 불법 포획하다 기소되면 동종 범행 전력이 없는 경우 벌금형 내지 징역 1년 미만의 집행유예형이 선고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약 재범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경우에도 징역 1년 이상 선고되는 경우를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재판부는 A씨 일당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그러면서 “밍크고래를 불법 포획할 경우 많은 수익이 예상되지만, 적발되더라도 대부분 벌금형 또는 집행유예형에 그친다는 현실은 일부 어민들에게 불법 고래 포획에 대한 동기를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지난해 6월 8일 오전 11시 15분쯤 울산시 울주군 간절곶 남동쪽 34㎞ 해상에서 A호 등 선박 2척이 불법으로 작살을 쏴 고래를 잡는 모습이 순찰 중인 해경 항공기에 포착됐다. 사진 울산해양경찰서.

지난해 6월 8일 오전 11시 15분쯤 울산시 울주군 간절곶 남동쪽 34㎞ 해상에서 A호 등 선박 2척이 불법으로 작살을 쏴 고래를 잡는 모습이 순찰 중인 해경 항공기에 포착됐다. 사진 울산해양경찰서.

판결문 6장엔 ‘고래 보호해야 할 이유’

 
 동시에 유 판사는 판결문 중 6장을 할애해 밍크고래 포획을 금지해야 할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다음은 판결문에서 일부 발췌해 정리한 내용이다.  
 

 “우리가 고래를 보호해야 할 이유는 단지 고래가 멸종위기종이라는 도덕적 가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이상 기후변화 및 위기를 저지해 미래 세대의 인류 생존에 기여하고, 인간이 고래를 비롯한 다른 생명체와 같이 지구에서 공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중략)
 

 “지구의 자원은 유한하며, 인간 역시 다른 생물체들과 마찬가지로 지구를 공유하고 있는 존재라고 여겨야 한다. 지구에서 생물체들이 살아가기에 위험한 환경이 조성됐다면 인간도 위험한 환경에 노출돼 있는 것이다.”

 
(중략)
 

 “누군가 고래를 포획해 현금을 만지게 되면 동시에 생태계 균형 훼손, 이상 기후변화도 같이 발생할 것이다. 또 이 상황이 누적되면 언젠가 우리 미래 세대의 불특정 다수의 인류에게 큰 재난과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

 

 “고래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고, 고래를 보호해야만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은 문구로 요약해 본다. ‘고래가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인간 역시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

 
울산=백경서 기자 baek.kyungs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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