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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수의 카운터어택] 아름답게 지는 법

중앙일보 2021.01.15 00:27 종합 26면 지면보기
장혜수 스포츠팀장

장혜수 스포츠팀장

“장 선배, 난리 났어.” 마감 시간 무렵 걸려온 전화 한 통. 한 옥타브 높아진 후배 목소리.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무슨 일인데.” “연수원 벽에 구멍이 뻥뻥 뚫렸고, 문짝이 성한 게 없대.” 2002년 6월 21일 늦은 오후였다. 시곗바늘을 하루 전으로 돌려 자초지종을 보자.
 
전날(20일) 밤, 대전 월드컵경기장에서 2002 한·일 월드컵 16강전 한국-이탈리아의 경기가 열렸다. 한국은 18분 만에 크리스티안 비에리에게 선제골을 내줬다. 카테나치오(빗장수비)의 이탈리아는 ‘선제골=승리’라는 공식의 팀이다. ‘월드컵 첫 승리와 16강, 아쉽지만 선전한 한국 축구’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거의 다 썼다. 후반 43분, 설기현의 동점골이 터졌다. 가격 폭락한 배추밭 갈아엎듯 기사를 갈아엎었다. 연장 후반 12분, 안정환의 서든데스 결승골이 터졌다. 한국의 2-1 역전승. 기쁨을 젖혀두고, 빛의 속도로 기사를 마감했다.
 
마감을 끝낸 뒤 동료와 맥주잔을 기울이며 경기를 복기했다. 그때가 21일 새벽 1시쯤이었다. 바로 그 시각, 이탈리아 대표팀이 숙소인 충남 천안의 국민은행 연수원으로 돌아왔다. 독이 오른 선수들은 숙소 기물을 부쉈다. 주먹과 발로 벽을 내리쳤다. 날이 밝았고, 그들은 오후 3시쯤 귀국길에 올랐다. 떠난 자리에 남은 건 난동의 잔해였다. ‘승부에서도 지고, 스포츠맨십도 저버린’ 대표 사례다.
 
미 의사당에서 시위하는 트럼프 지지자들. [EPA=연합뉴스]

미 의사당에서 시위하는 트럼프 지지자들. [EPA=연합뉴스]

20년 가까이 된 사건의 데자뷔 같은 일이 최근 벌어졌다. TV로 생생한 현장이 중계됐다. 7일(한국시각)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를 확정하는 상하원 합동 회의를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이 워싱턴DC 국회의사당에 난입했다. 발단은 이날 오전 백악관 앞 집회에 모습을 드러낸 트럼프의 선거 불복 선언이었다. 그는 “의사당으로 가 힘을 보여줘야 한다”고 선동했다. 애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의사당에 나뒹군 건 난동의 잔해였다. 트럼프는 결국 ‘선거에서도 지고, 탄핵당할지 모를’ 운명을 맞았다.
 
이왕 미국 얘기를 꺼냈으니, 아름답게 졌던 한 인물 얘기도 해보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과 스티븐 더글러스는 평생의 정적이었다. 두 사람은 30여년간 여러 선거에서 경쟁했다. 사랑을 놓고도 경쟁했다 한다. 더글러스는 마지막 대결이었던 1860년 대선에서 링컨에 졌다. 더글러스는 남북전쟁이 터지자 발 벗고 나서서 링컨을 도왔다. 더글러스가 미국 전역을 돌며 30만명의 북부 의용군을 모은 건 미국사 명장면이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집 『일인칭단수』에 수록된 ‘야쿠르트 스왈로즈 시집’의 한 구절이다. ‘인생은 이기는 때보다 지는 때가 더 많다.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지혜는 ‘어떻게 상대를 이기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잘 지는가’ 하는 데서 나온다.’(131쪽)
 
장혜수 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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