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영원한 원수인가
![일본 교토의 이총(耳塚·귀무덤)에서 살풀이는 하고 있는 모습. 왜군은 정유재란 당시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가 영혼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이총을 만들었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1/15/c4e9eb80-62ba-4bfc-930c-467a149f08fe.jpg)
일본 교토의 이총(耳塚·귀무덤)에서 살풀이는 하고 있는 모습. 왜군은 정유재란 당시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가 영혼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이총을 만들었다. [중앙포토]
임란·일제로 고착화한 대일 의식
최근 ‘토착왜구’ 논란까지 이어져
일본과 국교 재개한 선조의 결단
위기의 양국 관계, 냉철한 성찰을
통일신라~조선 건국 시기 외교 단절
![조선시대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 행렬도. [사진 국립중앙박물관]](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1/15/b92a616c-d959-4ac0-9c38-2d9b72911251.jpg)
조선시대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 행렬도.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국교는 열렸지만 왜구의 침략과 만행을 겪었던 조선 사람들의 일본 인식이 좋을 리 없었다. 원한과 적개심이 고조됐다. 조선을 중국에 버금가는 문명국이라 자부했던 지식인들은 일본인을 왜적(倭賊)·왜노(倭奴)·도이(島夷)라 부르고, 문명국 조선이 야만국 일본을 은혜와 위엄으로 다독이고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의 일본 인식은 확실히 굳어진다. 무고하게 쳐들어와서 조선 사람들을 죽이거나 붙잡아 가고, 귀나 코까지 베어 갔던 왜노들은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원수’(만세불공지수·萬世不共之讐)가 됐다. 17세기 초의 한 지식인은 “동해의 파도로써 일본을 완전히 침몰시켜 버려도 조선의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고 절규했다. 일각에서는 대마도만이라도 정벌하여 일본에 복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대마도 정벌은커녕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은 일본과의 관계를 단절할 수 없었다. 일본의 재침 우려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당시 만주에서 한창 떠오르고 있던 여진족 누르하치의 위협에 대처하려면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는 것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668년 무렵 신라가 직면했던 고민이 임진왜란 이후에도 재현됐던 셈이다. 조선은 논란 끝에 국교를 재개한다. 왜관을 다시 열어 일본인들의 거주를 허용하고 통신사를 파견했다.
![왜구(오른쪽)와 명나라 군대의 전투를 그린 ‘항왜도권’(抗倭圖卷). [사진 도쿄 창원사 발간 『도설중국문명사9』에서]](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1/15/c57b2252-edf3-4e09-84ad-e1b240b048fe.jpg)
왜구(오른쪽)와 명나라 군대의 전투를 그린 ‘항왜도권’(抗倭圖卷). [사진 도쿄 창원사 발간 『도설중국문명사9』에서]
선조는 특히 왜란 이전 서울에 머물던 일본 상인들이 상거래에만 집중할 뿐, 자국의 내부 사정을 일절 발설하지 않았던 것을 찬양했다. 그러면서 “만일 조선 상인들이 일본에 갔다면 하루도 안돼 조선 사정이 전부 누설되었을 것”이라고 통탄한 바 있다. “영원한 원수와 화해하는 것은 절대 불가”라는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과 국교를 재개한 배후에는 선조의 이 같은 냉정한 현실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문에 굳어진 원한과 경계심, 문화적 우월감에 바탕을 둔 일본에 대한 폄하 의식은 조선 후기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지식인 사회의 통념과는 전혀 다른 일본 인식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영조대 영의정을 지낸 홍치중(洪致中·1667∼1732)이 대표적이었다. 1730년(영조 6) 11월 17일, 영조는 신료들과 국정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일본 문제를 언급한다. 영조는 “교활하고 간사한 왜인들의 침략을 막으려면 그들에게 약속한 것을 제대로 지급하면서 다독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의정 홍치중은 영조의 말에 동의하면서 일본과 교린(交隣)하기로 약속한 이상 조선이 먼저 성신(誠信)을 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서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왜인이 교활하고 간사하다고 하는데 깊이 들어가서 보니 그러한지 모르겠습니다. 통신사로 갔을 때 길에 있는 왜인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으니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이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풍속이 이와 같습니다만, 대마도 사람들은 모든 악(惡)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가까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한마디로 당시 통념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발언이다. 홍치중은 이조참판으로 있던 1719년(숙종 45), 통신사의 우두머리로 일본을 다녀왔던 관인이다. 현지에서 일본을 직접 체험했던 홍치중은 ‘일본인은 교활하고 간사하다’는 평가에 이의를 제기한다. 나아가 대마도 사람들은 극악하다고 규정하고 그렇게 만든 책임이 조선에 있다고 강조한다. 요즘이었다면 홍치중은 틀림없이 ‘토착 왜구’로 매도돼 거센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일방적 우월감도, 적개심도 경계해야
여하튼 19세기 이후에도 일본의 폭력 앞에서 한국의 수세(守勢)와 고난은 이어졌다. 일본의 군사적 협박에 밀려 마지못해 개항했고, 끝내는 국권을 빼앗기고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같은 경험 때문에 해방 이후에도 한국인들의 일본 인식은 임진왜란 이후의 그것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일본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 경쟁의식이 불타오르는 한편에서 그들이 지닌 힘을 두려워하고 동시에 선망하는 다면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일본은 밉지만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의식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어떤가. 요즘의 한국인들은 이전 세대와 달리 일본에 대해 자신감이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잃어버린 20년’을 운운할 정도로 일본의 기세가 예전 같지 않은 반면, 구매력 기준 1인당 GDP가 조만간 일본을 추월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올 만큼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 것이 기본적인 배경일 것이다. 자신감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자신감이 지나쳐 상대를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금물이다. 한·일 관계가 위기에 처한 오늘, 우리 내부를 냉정하게 돌아보고 일본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려는 자세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14세기 왜구와 16세기 왜구
왜구란 본래 ‘왜(倭)가 쳐들어와 노략질하다(寇)’에서 비롯된 단어다. 왜구는 활동 시기에 따라 보통 14세기 왜구(전기 왜구)와 16세기 왜구(후기 왜구)로 구별한다. 전자가 주로 일본인으로 구성된 해적 집단이라면, 후자는 일본인뿐 아니라 다수의 중국인이나 포르투갈인도 포함된 무장 상단이었다.
고려와 조선에 커다란 피해를 끼친 집단은 전기 왜구인데, 이들은 때로 수천 명의 대병력이 한반도의 바다와 연안, 내륙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여 약탈·살인·납치·방화 등을 자행했다. 고려 말 왜구가 서해를 오르내리며 조운선을 공격하고, 개경 근처까지 위협하자 고려는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자고 고민할 정도였다.
고려와 조선에 커다란 피해를 끼친 집단은 전기 왜구인데, 이들은 때로 수천 명의 대병력이 한반도의 바다와 연안, 내륙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여 약탈·살인·납치·방화 등을 자행했다. 고려 말 왜구가 서해를 오르내리며 조운선을 공격하고, 개경 근처까지 위협하자 고려는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자고 고민할 정도였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