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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韓, 구급차 사준다고해 거절했다" 협상 내용 일방 공개

중앙일보 2021.01.14 15:53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이 한국 선박 억류 문제를 매듭짓지 못하고 귀국한 가운데, 이란 정부가 “한국이 동결 자금으로 구급차를 사주겠다고 해 거절했다”고 밝혔다.
 

빈손 귀국 억류 협상, 외교력 부재 논란
이란 발표로 보면 '미국설득' 숙제 떠안아

마무드 바에지 이란 대통령 비서실장은 13일(현지시간) 이란 정부 홈페이지에 “한국 대표단이 이란 중앙은행의 동결된 자금으로 구급차를 구매해 제공하겠다고 제안해 이를 거절했다”고 밝혔다. 바에지 실장은 “우리는 구급차 몇 대가 필요한 게 아니다. 한국에 묶여있고 반드시 돌려받아야 하는 돈을 요구할 뿐”이라며 “이란 외무부와 중앙은행 관계자들은 한국 대표단에게 분명하게 대응했다”고 밝혔다. 또한 한국 대표단을 ‘한국인들’이라고 지칭하기도 하며, “한국인들이 귀국 후 동결자금을 풀어줄 수 있도록 허가를 받기로 약속했다”고도 주장했다.
이란 정부 홈페이지에 공개된 마무드 바에지 이란 대통령 비서실장의 입장 [이란 정부 홈페이지]

이란 정부 홈페이지에 공개된 마무드 바에지 이란 대통령 비서실장의 입장 [이란 정부 홈페이지]

외교부는 이를 반박했다. 지난해 8월부터 연말까지 진행됐던 한·이란 인도적 지원 워킹그룹 회의에서 이란 측이 먼저 구급차를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당시 양국은 한국 내 동결자금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이 인도적 물품을 구매해 이란에 보내주고, 그 금액만큼 동결자금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논의 과정에서 인도적 물품이더라도 다른 용도로 전용될 우려가 있는 물품은 제하고, 최종적으로 이란 측이 요청한 물품이 의약품, 의료기기, 구급차 정도였다고 한다.
 
외교부 당국자는 “최 차관이 (이란에) 가서 새삼스럽게 제안한 것처럼 보도가 됐는데, 이는 사실과 많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구급차 도입은 어디까지나 이란 측이 먼저 원했기 때문에 협의했던 방안이라는 설명인데, “사실과 다르다”는 표현 자체가 사실상의 유감 표명으로 볼 여지가 있다. 통상 고위급 외교회담의 내용은 양측이 협의한 결과를 발표한다. 상대방이 불편한 내용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양해가 있어야 공식 발표에 포함하는 게 외교 관례다. 그런데 이란은 이를 무시하고 한국의 제안을 일방적으로, 그것도 일부 내용만 부각해 공개했다.
 

 협상단 보냈지만 이란에 활용당해 평가 나와

이같은 이란 측의 외교적 무례에도 불구하고 당초 '창의적 방안'을 갖고 협상에 임하겠다고 알렸던 정부가 실제론 이란 측을 압박하거나 설득할 카드를 준비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외교 협상단을 파견하기로 했다면 당연히 치밀한 사전 전략 마련과 여건 조성을 거쳤어야 했는데 '한국 선박 억류'에 놀라 일단 사람부터 보낸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결과적으로 이란은 한국 외교부의 협상단 방문을 놓고 자신들의 단호한 입장을 과시하면서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 계기로 활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란 측의 이날 공개로 보면 최 차관 일행은 이란에게 동결자금을 풀기 위한 '미국 설득'을 약속해 오히려 숙제를 들고 귀국했다. 
 
이런 가운데 이란 측은 최 차관의 이란 방문 일정에 대해 “최선의 예우를 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이란 측은 최 차관이 자신보다 급이 높은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 등을 만날 수 있었던 건 “이란 정부가 최 차관에게 급을 높여 대우했고, 면담 요청한 인사를 최대한 만날 수 있도록 협조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최 차관은 이란 방문을 사실상 빈손으로 마무리하며 이란 측에 “일단 사태를 파악하러 온 것이고, 사태를 파악했으니, 충분한 답을 갖고 만나는 자리를 다시 만들겠다”는 취지를 전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연장 선상에서 협상의 파트너였던 압바스 아락치 외교차관을 한국으로 초청했다는 분석이다.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이 11 일(현지시간) 이란 테헤란에서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을 면담했다. [이란 외무부]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이 11 일(현지시간) 이란 테헤란에서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을 면담했다. [이란 외무부]

 

 '빈손 귀국' 최 차관 "이란 정부 조치 신속히 있을 것 믿어" 

최 차관은 2박 3일간의 이란 방문을 마치고 귀국 전 13일(현지시간) 카타르를 방문해 외교부 장관 등 고위급 인사들에게 억류 선박과 관련한 지원을 요청했다. 카타르는 주변국 중 이란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한·이란 양자 협의에서 풀지 못했던 문제를 놓고 제3국에 협조를 요청하는 게 얼마나 효과를 볼지는 불투명하다. 최 차관은 14일 귀국 후 인천국제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조기 석방이라는 결과물을 도출 못 했지만, 한·이란 양국은 그 결과를 위한 커다란 걸음을 함께 내디뎠다"며 "선박과 선원에 대한 이란 정부의 조치가 신속히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최 차관은 "우리가 해야 할 말을 엄중히 했고 그들의 '좌절감'을 정중히 경청하기도 했다"고도 말했는데, 들고 있던 메모에서 '말'이라고 적혀있던 부분을 '좌절감'으로 고쳐서 읽었다. 외교관이 메모를 노출하는 자체도 흔치 않은 장면이다.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이 14일 귀국한 뒤 기자들과 만났을 당시 들고 있던 메모 [연합뉴스]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이 14일 귀국한 뒤 기자들과 만났을 당시 들고 있던 메모 [연합뉴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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