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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40년 만의 한파에 꽁꽁 언 마음 녹여주는 늙은 오빠

중앙일보 2021.01.13 07:00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74)  

아침 7시 출근 준비 벨이 울림과 동시에 전화벨이 울린다. 깜짝 놀라 받으니 앞집 언니다.
“새댁아, 일어났나? 물이 얼어서 한 방울도 안 나온다. 난로 좀 빌려줘.”
 
40년 만의 한파에 수도 계량기가 파손됐다는 뉴스가 흘러나오는데, 앞집에서 그런 사고가 터졌다. 작은 비상용 전기난로 두 개와 생수 두병을 챙겨 달려가니 항상 내 주위에 있어 존재감을 몰랐던 물의 소중함을 새삼스레 느낀다. 화장실과 주방 배관 쪽에 난로를 피우고 30분이 지나도 물이 나올 생각을 안 한다. 아저씨는 아무래도 바깥에 있는 선이 언 것 같다며 기계를 가지러 나가고 어수선한 모습을 뒤로 한 채 나는 출근을 했다. 한 시간 후 걱정이 되어 전화하니 방금 물이 나온다며 걱정하지 말란다. 후유.
 
40년 만의 한파에 수도 계량기가 파손됐다는 뉴스가 흘러나오는데, 앞집에서 그런 사고가 터졌다. [사진 pixabay]

40년 만의 한파에 수도 계량기가 파손됐다는 뉴스가 흘러나오는데, 앞집에서 그런 사고가 터졌다. [사진 pixabay]

 
퇴근하면서 바로 앞집으로 달려가 보니 종일 밖에서 허둥거렸는지 아저씨는 벌겋게 언 얼굴로 보일러 불을 때고 있다. 아침에 갖고 간 난로를 가지러 안으로 들어가는데 주방과 다용도실이 물바다다. 나는 호들갑을 떨며 소리 질렀다.
“큰일 났어요. 안에 난리 났어요. 물이 어디서 새나 봐요.”
 
아침에 언 수도꼭지를 다 틀어놓고 나갔는데, 다용도실에 있던 배관이 세로로 찢어지면서 터져 물난리가 난 것이다. 긴급 수리만 한 후 춥고 어수선해 부인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라 한다. 이 추위에 퇴근하고 저걸 청소하려면 얼마나 마음이 황량할까 싶어 조금이라도 물을 퍼내 보려고 다시 들어가니 북쪽으로 나 있는 시골집 다용도실은 시베리아 벌판보다 더 을씨년스럽고 손과 발이 시려서 엄두가 안 난다.
 
언니가 퇴근하면 뭔 수가 나겠지 하고 집에 돌아와 누웠다. 잠이 안 온다. 뉴스에선 며칠째 계속되는 한파 경보에 피해가 속출하고 아파트에선 전기가 끊겨 냉동실 같은 집에서 밤잠을 설친 주민의 애타는 사연이 들려온다. 정말 너무 춥다. 언니가 오면 얼마나 서글플까. 오자마자 달려가서 같이 청소해야지 하는 마음과 전화가 안 왔으면 하는 마음이 서로 투덕댄다. 늦게까지 전화가 안 온다. 다음 날 아침 궁금해 일찍 달려가니 물로 흥건했던 마룻바닥이 빙판 썰매장이 되어 있다.
 
“어제 칼바람을 헤치고 퇴근하니 몸이 덜덜 떨리는데 상황이 너무 서글퍼 수도꼭지를 네가 열었네, 내가 열었네, 네 탓, 내 탓 하며 전쟁 치르다가 그냥 잤지. 호호.”
“이 마당에 웃음이 나와요? 이제 얼어버려서 어쩌면 좋아요”라고 걱정하니, “아이고 야야, 괜찮아, 괜찮아. 1·4 후퇴 때, 6·25 때 비하면 이건 장난이지”하신다. “내가 쉬는 날이라 도울 테니 빨리 청소하자”하니 일단 밥부터 먹고 시작해도 금방 한단다.
 
그러면서 보리밥에 나물 반찬과 된장찌개를 뚝딱 하고 만들어 차린다. 상황은 서글퍼도 함께 먹는 보리밥은 왜 이렇게 맛이 좋은지. 에그.
 
모든 일상의 일이 무인으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그래도 마음의 위안을 얻고 온기로 기댈 수 있는 것은 사람이다. [사진 pixabay]

모든 일상의 일이 무인으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그래도 마음의 위안을 얻고 온기로 기댈 수 있는 것은 사람이다. [사진 pixabay]

 
작업이 시작되었다. 언니는 망치를 들고 엿장수 엿 자르듯 얼음을 톡톡 치고, 나는 들통에 얼음조각을 담아 버리기를 몇 번 하니 정말 장난처럼 금방 끝이 났다.
 
“어제 퇴근해서 보니 얼마나 서글프고 속상한지…. 그래도 머리를 굴려 이왕 추운 거 다용도실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잤더니 이렇게 꽁꽁 얼어 청소하기가 수월해졌어. 내 머리 좋제? 호호.”
 
언제나 긍정적인 어르신의 재치와 일상의 연륜은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다. 청소를 끝내고 커피 한잔하고 있으려니 이웃 꼬부랑 할머니가 물이 안 나온다며 울상을 하고 들어오신다. 아저씨는 걱정하지 말라며 차 한 잔을 권하고 물 녹이는 장비를 꾸려 앞장선다.
 
자동차도 혼자 달리고, 비서도 AI 로봇이 다 알아서 해주는 모든 일상의 일이 무인으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그래도 마음의 위안을 얻고 온기로 기댈 수 있는 것은 사람이다. 연로하신 어르신의 아들이 되어 꽁꽁 언 마음마저 녹여주는 늙은 오빠의 발걸음이 감사하다.
 
 
늦은 밤, 계속되는 한파 뉴스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가 새벽녘 전화벨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새댁아, 이번엔 소 외양간 물통이 얼어 터졌다. 연장 사러 가야 하는데 어쩌지?”
“걱정하지 마세요.”
이른 아침 전투 복장과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나와 꽁꽁 언 차의 시동을 건다.
 
소 외양간에 올라가니 아저씨는 얼음 조각이 되어 떨고 서 있다. 2톤짜리 물통 주둥이가 터지면서 쏟아 내린 물과 얼음을 못 피하고 뒤집어쓴 거다. 눈물이 나야 하는데 웃음이 먼저 난다. 더 미안한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
 
“주둥이만 갈면 된다카이. 그래도 이만하니 괜찮아. 암만.”
내가 힘들 때 내 손을 잡아주신 두 분의 사랑. 두 분의 웃음이 있어 오늘도 난 춥지 않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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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옥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필진

[송미옥의 살다보면] 요양보호사 일을 하다 평범한 할머니로 지낸다. 지식은 책이나 그것을 갖춘 이에게서 배우는 것이지만, 인생살이 지혜를 배우는 건 누구든 상관없다는 지론을 편다. 경험에서 터득한 인생을 함께 나누고자 가슴 가득한 사랑·한·기쁨·즐거움·슬픔의 감정을 풀어내는 이야기를 쓴다. 과거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이웃과 함께 남은 인생을 멋지게 꾸며 살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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