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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정인이가 우리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

중앙일보 2021.01.13 00:19 종합 29면 지면보기
배기수 아동학대예방 자문가·아주의대 소아청소년과 교수

배기수 아동학대예방 자문가·아주의대 소아청소년과 교수

16개월짜리 정인이를 학대해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기소 된 양모에 대한 첫 재판이 13일 열린다. 경찰은 제역할을 못했지만, 법원이라도 죄상을 철저히 규명해 엄벌하기 바란다.
 

지금도 학대받는 아이들 구하려면
경찰의 대응 시스템 뜯어 고쳐야

정인이는 인생의 절반을 폭행당하다 안타깝게 숨졌다. 해맑게 잘 웃던 아이가 입양 8개월 동안 학대로 뼈가 부러지고 췌장이 끊어지고 피부는 시꺼멓게 변했다. 체중은 입양 당시보다 외려 줄었다. 몇 차례 회생 기회도 있었지만 무산되고, 지난해 10월 13일 끝내 사망했다.
 
죽지 않았어야 할 정인이의 사망 과정과 책임 소재를 냉정히 따져보자. 정부는 지난해 10월부터 아동보호 체계를 강화해 지방자치단체마다 전담 공무원, 담당 경찰관을 두고 협력해 대응하도록 했다. 정인이의 학대 피해를 의심한 어린이집 교사, 소아청소년과 의사, 주변 지인의 신고는 적절했다.
 
하지만 응급조치권을 쥔 경찰의 대응이 너무도 엉터리였다. 누가 봐도 학대 피해가 심각한 아이였는데도 경찰은 세 번이나 돌려보냈다. 학대를 변별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실무 경험이 많은 전문가의 의견이 무시돼 이 지경이 됐다.
 
서울 양천경찰서의 무능하고 부실한 아동보호 대응이 경찰 조직 전체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몇 년 전 피해 아동을 부모와 분리했던 경찰관이 부모에게 고소당하고 징계받는 사례가 있었다. 당연히 경찰 조직 내부에 아동학대 응급조치는 신중히 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졌을 것이다. 정인이 사건 담당 수사관에게도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학대받는 아동을 구하지 못한 경찰은 사실상 공범 또는 방조범이 될 수도 있다. 김창룡 경찰청장은 뒤늦게 유사 사건 재발 방지를 위해 특별수사대를 신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차제에 땜질식 뒷북 처방이 아니라 근본적 시스템 개선과 환골탈태 노력이 절실하다.
 
양모는 여러 번 경찰 조사를 받았지만, 근본적 태도 변화가 없었다. 거짓말이 너무나도 쉽게 통했기 때문에 갈수록 학대 행동이 대범해졌다. 급기야 정인이가 숨진 마지막 날에도 엉터리 주장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정인이의 목숨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119 응급차를 부르지 않고 콜밴 택시를 불러 병원으로 옮겼다.
 
검·경 수사에 따르면 정인이의 죽음은 우발적 살인이나 사고와는 달라 보인다. 사망 전날 어린이집 측의 간곡한 부탁에도 양모는 정인이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 누적된 학대로 괴로워하며 죽어가는 아이를 지켜보면서도 응급실로 데려가지 않고 학대를 계속했다고 한다.
 
양부의 경우 책임을 회피하지만, 이토록 심한 학대 정황을 8개월간 몰랐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믿기 어렵다. 양모의 학대를 묵인·방조했다는 비난을 떨치기 어렵다. 양부모 중 한 명만이라도 제 역할을 했다면 정인이의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분노가 치민다. 입양한 아이를 키우기 힘들면 차라리 파양(罷養)하면 됐을 것을 왜 굳이 아이를 죽게 했나. 양부모는 파양할 경우의 체면 손상을 더 의식했나. 애완용 강아지를 입양해도 이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학대받은 수많은 아동 사례를 가까이서 지켜봐 온 소아청소년과 의사로서 필자는 불과 492일을 살다간 정인이가 세상에 하고 싶었던 마지막 말을 감히 짐작해 본다.
 
“저를 반년 동안 이쁘게 잘 돌봐주신 ‘첫 엄마’(위탁모) 고맙습니다. 첫 엄마의 사랑을 받으며 깔깔대던 때가 짧은 일생에서 제일 행복했어요. 하늘나라에서는 매 맞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안전해요. 첫 엄마가 아니었다면 세상은 학대받다 죽는 곳인 줄로만 알았겠죠. 어린이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말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저처럼 학대받고 말조차 못하는 불쌍한 아이들을 제발 좀 구해주세요.”
 
배기수 아동학대예방 자문가·아주의대 소아청소년과 교수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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