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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스물 임신부, 새해 첫날 낙태 요구”…카톡방선 중절 상담

중앙일보 2021.01.13 00:02 종합 2면 지면보기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관계자들이 지난해 12월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처벌의 시대는 끝났다!’며 낙태죄 없는 2021년 맞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관계자들이 지난해 12월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처벌의 시대는 끝났다!’며 낙태죄 없는 2021년 맞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임신 초기라 아기집도 안 보이는 2000년생 여성이 찾아와 인공 임신중절 문의를 하더군요. 다음 주에 다시 오라고 돌려보냈지만, 정부 기준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낙태죄 사라진 의료현장 혼란
임신중절수술 거부 땐 되레 처벌
산부인과 ‘10주 미만만 수술’ 지침
수술비도 70만~220만원 천차만별

서울 은평구의 한 산부인과 전문의 A씨(35)는 12일 기자에게 이렇게 하소연했다. A씨의 병원에는 1월 1일 낙태죄 효력이 정지된 이후 벌써 임신중절을 원하는 환자 4명이 찾아왔다고 한다. A씨는 “‘병원 내규가 없어 아직 임신중절은 하지 않는다’며 돌려보냈다”고 말했다.
 
A씨가 골머리를 앓는 이유는 현재 낙태죄 관련 법 조항이 사실상 공백 상태라서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낙태죄 관련 조항(형법 269조 1항 약물 등에 의한 자기낙태죄, 270조 1항 의사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2020년 12월 31일까지 대체입법을 해 달라”고 국회에 요청했다. 이에 따라 법무부는 임신 14주 내에선 아무 조건 없이 낙태를 허용하고 15~24주 이내엔 조건부 허용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마련했지만, 정치권과 여성단체 등이 반발하면서 아직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헌재가 제시한 시한이 종료되면서 기존 법은 효력을 잃게 됐다.
 
지난해 말 대한산부인과의학회가 현장의 혼란을 우려해 ‘임신 10주 미만의 산모에게만 중절수술을 시행하며 10~22주의 경우 충분한 숙려 기간을 갖도록 한다’는 내용의 ‘선별적 낙태 거부안’을 내놓았지만 어디까지나 권고사항일 뿐이다. 의사들 사이에서는 ‘임신중절수술 거부 시 진료 거부로 처벌받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한 산부인과 의사는 “규정이 없어 환자를 돌려보냈는데 보건복지부에 진료 거부로 신고할까 봐 두려웠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신념에 따라 임신중절수술을 하지 않을 권리에 대한 보장이 필요하다는 여론도 있다.
 
아직 법규가 없는 상황인데도 낙태 의료시장은 요동치고 있다. 기자가 서울·경기권 산부인과 6곳에 임신중절 비용을 문의했더니 70만~220만원까지 다양한 답변이 돌아왔다. 임신 7주 이후엔 한 주가 지날 때마다 추가금 10만원이 붙는다는 곳도 있었다. 병원마다 인공 임신중절수술이 가능하다고 답한 임신 주수도 천차만별이었다.
 
임신중절수술 관련 정보가 오가는 오픈 카톡방도 성황이다. 20, 30대 80여 명이 소속돼 있는 한 카톡방에선 “수술 후 생리대를 가져가야 하나” “남자친구 대신 동성 친구를 데려가도 되냐”는 등의 질문이 올라와 있었다. 병원 추천 문의에는 “병원명을 밝히면 불법이라 별도로 추천 리스트를 보내주겠다”는 답이 달렸다. 유산유도제 미프진 등 임신중절 약물에 대한 문의도 늘고 있다. 정부는 허용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아직 수입 허가신청을 한 제약회사는 없다. 미프진 등이 필요한 여성은 현재처럼 암암리에 해외 직구 등을 통해 구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낙태죄 입법 공백을 경험한 게 한국만은 아니다. 캐나다도 1988년 낙태죄 위헌 결정 이후 지금까지 관련 법을 만들지 않았다. 그 대신 오랜 사회적 논의를 통해 여성과 의사가 인공 임신중절수술을 결정하면 정부와 민간기금이 비용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장미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입법이 늦어지는 이유는 여성의 건강권과 태아의 생명권 간에 합의점을 도출하는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며 “사회적 논의를 충분히 거친 이후에 임신중절 여성들을 위한 지원과 정보체계 마련, 미혼모에 대한 경제적 지원 등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연수 기자 choi.yeonsu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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