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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수장 된 '외교거인' 번스···韓 미소짓게 하는 유쾌한 추억

중앙일보 2021.01.12 17:34
미국뿐 아니라 세계의 정보를 장악할 인물, 윌리엄 번스 CIA 국장 지명자. 2014년 사진. AP=연합뉴스

미국뿐 아니라 세계의 정보를 장악할 인물, 윌리엄 번스 CIA 국장 지명자. 2014년 사진. AP=연합뉴스

 
2010년 8월 24일, 천영우 당시 외교부 2차관은 무거운 마음으로 워싱턴DC 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의 이란 제재로 인해 국내 기업이 애꿎은 샌드위치 신세가 된 것을 교섭하기 위해서였다. 국내 기업은 이란 원유가 필요했고, 결제를 미국 달러로 했으나 미국의 이란 제재로 대금 결제가 안 된 상황이었다. 미국의 입장이 강경했기에 국무부의 정무 담당 차관실에 들어선 천 당시 차관의 어깨는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 앞에 나타난 인물이 윌리엄 번스(65) 차관이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이 11일(현지시간) 미국 정보기관의 수장인 중앙정보국(CIA) 국장으로 지명한 그 번스다. 
 
한국의 외교부 격인 미국 국무부 인사가 CIA 수장으로 지명된 건 사상 처음이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서 상대적으로 핵심에서 밀려나며 설움을 겪었던 국무부에 볕 들 날이 왔다는 얘기가 나온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11일 “번스는 ‘외교 정책의 거인’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라며 “그런 그가 CIA를 맡게 된다는 것은 함의가 크다”고 분석했다.  
 
현재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인 천 전 차관은 12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2010년 당시) 이란 문제로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며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할 줄 아는 최고의 외교관으로 기억한다”고 전했다. 천 전 차관은 이어 “상대를 낮춰본다는 느낌을 주는 일부 다른 고위직들과는 달랐다”며 “서로 이견이 있더라도 외교적 합의를 찾고 상대를 배려하는, 인품과 실력을 두루 갖춘 인물”이라고 말했다. 천 전 차관과 번스 당시 차관의 만남 이후, 한국은 묘수를 찾았다. 미국의 승인 하에 달러 결제 대신 국내 은행에 원화 결제 계좌를 만드는 지불 시스템을 만들면서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동결되기 전까진 한국과 이란 간의 요로 역할을 하는 계좌였다.  
 
미국 국무부 로고. 트럼프 행정부에서 찬밥신세였다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AP=연합뉴스

미국 국무부 로고. 트럼프 행정부에서 찬밥신세였다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AP=연합뉴스

 
번스 지명자는 오랜 기간 이란 문제에 관여했고 ‘중동 통’이라는 평판을 쌓았다.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이란 핵합의(JCPOAㆍ포괄적 공동행동계획) 협상에서도 핵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사실 중동뿐 아니라 외교 전분야에서 경험을 쌓은 ‘뼛속까지 외교관’인 인물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세인트 존스 칼리지 출신인 그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인 1982년 국무부에 입부했다. 이후 주요르단 대사(빌 클린턴 행정부), 주러시아 대사(조지 W 부시 정부)를 거쳐 국무부에서 근동(近東) 지역 담당 차관보, 정무 차관에서 부장관으로 요직을 두루 맡았다. 2014년 퇴임까지 민주ㆍ공화 양당의 대통령 집권을 소화하며 비정파적 정통 외교관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 
 
현재는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이사장으로, 트럼프 정부에 대해 외교 정책을 훼손했다며 강력한 비판 목소리를 내왔다. 2019년에 낸 회고록 제목은 『막후 채널(the Back Channel)』, 부제 ‘미국 외교를 돌아보고 그 부활을 위해’였다.  
 
트럼프 정부에 대한 비판을 제외하고 그는 특정 대통령과 정파에 대해 중립성을 지켜왔다. 바이든 당선인은 번스를 지명한 이유에 대해 “번스는 정보기관은 정파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나의 깊은 신념을 공유한다”며 “그가 정보수장으로 있는 동안 미국인들은 안심하고 두 다리 뻗고 잠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 중앙정보국(CIA) 로고. 최근 지나 헤스펠 국장 주도로 새 로고를 만들었으나 바이든 정부에선 예전 로고를 쓸 가능성도 있다. [중앙포토]

미 중앙정보국(CIA) 로고. 최근 지나 헤스펠 국장 주도로 새 로고를 만들었으나 바이든 정부에선 예전 로고를 쓸 가능성도 있다. [중앙포토]

 
2019년 회고록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모든 악기가 함께 조화를 이루도록 신경을 쓰듯이 외교관 역시 미국이 내놓을 수 있는 모든 재능을 활용한다. 소프트 파워부터 문화, 공공외교부터 정보 수집까지 모든 재능 말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이 문구를 인용하며 “오바마 등 다양한 대통령 아래에서 수완을 보여온 그가 이젠 바이든 당선인 밑에서 더 은밀한 정보수장의 역할을 맡게 됐다”고 풀이했다.  
 
번스의 앞길은 험난하다. 워싱턴포스트(WP) 데이비드 이그네이셔스 칼럼니스트는 11일 “번스는 외교관이지 정보요원이 아니었다”며 “정보기관의 수장은 때로 대통령에게 듣기 싫은 말도 해야 하는데, 번스와 바이든은 꽤 친밀한 편”이라고 우려했다. 이그네이셔스는 또 “CIA는 변화를 싫어하는 조직”이라며 “이 조직을 장악하는 것은 번스의 최대 과제가 될 것”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번스의 지명은 한국엔 좋은 소식이다. 천 전 차관뿐 아니라 번스 지명자에 대해선 한국 외교가에도 호평이 자자하다. 신각수 전 외교부 제1차관은 12일 통화에서 “정통 외교관 중에선 베스트”라며 “진보와 보수를 떠나 두루 중용될 수 있는 실력과 품성을 갖췄다”고 말했다. 신봉길 주인도 대사는 페이스북에 “겸손하면서 부드러운 인상으로 누구에게나 호감을 준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이라는 글을 올렸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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