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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돈의 퍼스펙티브] ‘대통령 정부’ 이제 그만 버릴 때가 됐다

중앙일보 2021.01.11 00:25 종합 23면 지면보기

제왕적 대통령제

퍼스펙티브 1/11

퍼스펙티브 1/11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가 이제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문 대통령도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 라는 말을 듣고 있다. 국민을 통합하고 소통을 잘하겠다는 약속은 어디로 사라져버렸고 온 나라가 분열과 갈등으로 신음하고 있다. 이런 상황임에도 관심은 온통 다음 대통령을 향해 있다. 다음 대통령 선거도 죽기 살기로 하는 진영 대립이 될 것이니, 다음 대통령이 가는 길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대통령의 저주’에 걸려 있는 형상이다.
 

동유럽·중남미 대통령제 국가들, 국가 실패 걱정해야 하는 지경
대통령제 고향인 미국마저 권력 분립과 정치 관용 위태로워져
한국도 대통령 한마디에 나라가 흔들리는 비민주적 행태 지속
역대 지도자의 실패와 비극 끊으려면 의원내각제 도입 고민해야

독일 출신 헌법학자 칼 뢰벤슈타인(1891~1973)은 대통령제가 연방제 등 독특한 요소를 가진 미국의 독특한 제도이므로 다른 나라가 쉽게 가져올 수 없는 경험이라고 설파했다. 그는 독일 뮌헨대에서 교수를 하다 나치 정부가 등장함에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앰허스트대에서 교수를 지내며 『정치권력과 정부 과정』 등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정부는 서유럽의 전통인 의회 정부, 즉 의원내각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중남미·한국(이승만 정부) 등 대통령제를 운용하는 다른 국가들은 권위주의적인 신(新) 대통령제라고 지적했다. 4·19혁명 이후 제정된 제2공화국 헌법이 의원내각제 정부를 택했던 것은 그런 점에서 당연한 결과였다.
  
역대 대통령, 퇴임 후 불행
 
미국 외에선 성공할 수 없다던 민주적 대통령제는 1990년 전후로 화려하게 귀환했다. 그 모범은 1987년 개헌을 통해 민주적 대통령제를 구현한 한국이었다. 경제 우등생인 한국의 정치적 민주화는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주었다. 중남미에선 피노체트 정권의 독재를 종식한 칠레가 1989년 대선을 통해 민주적 대통령 시대를 열었다. 무늬만 대통령제를 운용해 왔던 중남미의 다른 국가에도 민주주의가 퍼지기 시작했다.
 
독일 통일과 소련 붕괴는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자신의 정부를 구성할 기회를 갖게 해 주었다. 폴란드는 내각제 요소를 가미한 대통령제 정부를 택했고, 헝가리는 의원내각제를 택했다.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는 대통령에게 약간의 권한을 주는 분권형 의원내각제를 택했다. 반면 장기 집권이 계속되고 있는 벨라루스·카자흐스탄·아제르바이잔 등은 전형적인 신대통령제 모습이다.
 
2020년 기준에서 볼 때 대통령제는 성적이 매우 좋지 않다. 동유럽 국가 중 민주주의가 기능하는 나라는 폴란드를 제외하면 의원내각제 국가들이다. 대통령제 정부를 운영하는 중남미 국가들은 민주주의는커녕 국가 실패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쳐 있다. 의원내각제를 운용하면서 그런대로 민주주의를 지켜왔던 터키는 신대통령제의 길로 접어들었다. 대통령제의 고향인 미국도 2016년 대선과 2020년 대선을 거치면서 과연 대통령제의 토대라고 하던 권력 분립 장치와 정치적 관용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와 우려가 나오고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다. 대통령의 마지막이 좋지 않아서 대통령제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논의는 해묵은 것이다. 전직 대통령의 실패와 비극은 각기 사정이 다르지만, 공통으로 지적되는 점이 있다. 대통령의 권한이 지나치게 많으며, 대통령만 되면 청와대 구중궁궐(九重宮闕) 속에서 파묻혀 제왕처럼 군림하다가 추락한다. 선거 때는 야당과 협력하며 국민과 소통하고 유능한 인물을 장관으로 발탁해 국정을 이끌겠다고 약속하지만, 대통령이 되면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며 부도를 내는 모습이 이어진다. 대통령이 가진 권력과 영향력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돼 얄팍한 자기 생각에 집착하다 실패하는 현상이 계속된다.
 
대통령을 보좌한다는 청와대 참모진은 장관 위에 군림하고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답변이나 하고 있으며, 대통령 말 한마디에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비민주적 행태가 지속하고 있다. 국무회의에서 진지하게 토론했다거나 대통령이 기자들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했다는 이야기는 근래 들어 본 적이 없다. 대통령의 오만으로 여야 대립은 극한을 달리고, 장관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 청문회에 나갈 후보를 구하기 위해 온 나라를 헤매는 코미디가 벌어진다. 이 정도라면 대통령의 실패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제도의 문제라고 해야 한다.
 
돌이켜 보면 대통령다운 대통령은 오랜 압제가 만들어 냈다. 박정희·전두환의 압제가 김영삼·김대중이란 걸출한 지도자를 만들었고, 국민은 이들을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 들어선 대통령은 그가 속한 당파의 수장에 불과했다.
  
대통령제는 권력의 제로섬 게임
 
무엇보다 대통령제는 국가 권력을 두고 제로섬 게임을 하는 양상이어서 승자·패자 간 간격이 너무 벌어지는 결정적 단점이 있다. 대통령이 독선으로 흐를 때 이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장치가 부족한 것도 대통령제의 치명적 단점이다.
 
의원내각제의 총리도 이론적으론 독재할 수 있지만, 내각은 어느 시점이든 무너질 수 있어서 대통령제의 대통령과는 차원이 다르다. 의원내각제 정부의 총리는 의회에 출석해서 의원 질의에 직접 답변을 해야 하므로 대통령궁에 은둔하면서 언론을 회피하고 그림자 통치를 하는 따위의 비민주적 행태는 가능하지 않다.
 
오늘날 우리 정치의 심각한 폐단은 진영 논리와 팬덤 정치다. 상대방을 주적으로 설정하고 거기에 대한 반대 논리로 진영을 구축하는 네거티브 파당 정치, 자기편을 광적으로 지지하는 팬덤 정치는 그 자체만으로도 부작용이 심각한데, 대통령제와 결부되면 더욱더 파괴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국정 지식과 경험이 부족해 토론은커녕 기자들의 질문에 변변하게 답을 못하는 사람이 열성적 지지자들의 팬덤 정치와 계파 정치에 힘입어 대통령 후보가 되고, 국민은 찬반 선택밖에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런 식의 대통령 선거를 계속해야 하며, 이렇게 당선된 대통령의 독선·불통에 따른 분열·갈등을 계속 감수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할 시점이다.
 
20대 국회선 다수가 대통령제 대신 의원내각제 지지
20대 국회는 1987년 이후 처음으로 개헌특위를 구성해 많은 논의를 했고, 정부 구조 개편 방향에 대한 의견을 모았다. 20대 국회의원 300명 중 약 80%가 개헌에 찬성했다고 보는데, 의원들의 절대 다수는 대통령제를 버리고 분권형 정부라고 지칭하는 변형된 의원내각제를 지지했다. 국회는 양원제로 하고 지방분권을 강화하자는 등 많은 논의를 했다. 각 정당은 여론을 수렴하고 개헌안을 만들었다. 20대 국회의 개헌특위 활동은 논의 범위가 포괄적이었을 뿐 더러 모든 헌법적 쟁점을 두고 제로 베이스에서 토론했기에 1987년 개헌 과정에서 국회가 했던 역할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개헌특위가 한창 활동을 할 당시 여당이던 자유한국당(국민의힘의 전신)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폐기하자고 목소리를 높였고, 제3당이던 국민의당도 분권형 정부를 토대로 하는 개헌안을 독자적으로 작성했다. 더불어민주당에도 대통령제를 그만두고 분권형 정부로 개헌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의원이 많았다. 당시 국회의장이던 정세균 총리는 개헌해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졌고, 지금 국회의장을 하는 박병석 의원도 개헌특위 위원으로 정부 구조를 바꾸는 개헌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국회 사무총장이던 우윤근 전 주러시아 대사는 여야 개헌특위 위원들과 함께 분권형 정부를 운영하는 오스트리아를 방문하기도 했다. 지방의 인구 감소에 따른 문제점을 해소하고 단원제 국회의 독선을 방지하기 위해 상원을 두어야 한다는 의견도 많은 지지를 얻었다.
 
그런데 그때 최순실 태블릿 PC 사건이 터졌고 촛불시위가 일어났다. 국회가 탄핵을 결의하고 헌법재판소가 이를 심리하게 됨에 따라 대선 일정이 앞당겨졌다. 문재인·안철수 등 대권 주자들은 자기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대선 정국으로 들어가자 개헌 논의는 동력을 상실했다. 2022년 대선에 나서는 어떤 유력한 후보가 개헌을 자신의 명분으로 내세운다면 20대 국회 개헌특위가 해 놓은 연구와 논의 결과는 훌륭한 토대가 될 것이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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