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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은의 트렌드터치] 슬세권 홈 라이프가 뜨고 있다

중앙일보 2021.01.11 00:18 종합 25면 지면보기
이향은 성신여대 서비스·디자인공학과 교수

이향은 성신여대 서비스·디자인공학과 교수

어린 시절 골목길을 내 집 마당 삼아 뛰어놀던 아이들에게 좁은 집의 갑갑함을 느낄 새는 없었다. 성장기와 호황기를 거치며 한국의 주거형태는 고층 아파트로 빠르게 대체되었고, 찌개 냄새 솔솔 풍기던 골목은 사라졌다. 발코니가 사라진 고층건물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여행과 플랜테리어(플랜트+인테리어)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크기의 한계에 부딪힌 집
새 방법의 확장을 모색하다
집 근방 상권을 거점 삼아
고립 탈출, 홈 라이프 즐긴다

그러던 중 우리는 유례없던 팬데믹을 맞닥뜨렸고, 여행으로의 출구가 막혀버린 채 가장 안전한 공간인 집에 은신했다. 반강제적 감금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 되어버린 집. 우리는 먹고, 자고, 사고, 놀고, 운동하고, 공부하고, 휴식하고, 꿈을 꾸는 모든 활동을 집에서 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다양한 층위의 레이어를 더해가며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잉태하고 거주자의 시간을 입체적으로 채워가는 집의 변화, 그중에서도 주목해야 할 것은 집의 확장, 지근(至近)거리 홈라이프다. 재택근무와 원격수업으로 집에서의 체류시간과 동시수용 인원이 늘어나게 되었고, 크기의 한계에 부딪힌 집이 새로운 방법으로 확장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지근 거리 홈라이프란 집의 바운더리를 동네로 확장시켜 집 근처의 편의 시설들을 거점 삼아 홈의 기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자연스레 집 근방의 동네상권, 이른바 슬세권(슬리퍼+세권, 편한 복장으로 이용할 수 있는 주거 권역)이 뜨고 있다. 물리적으로 좁은 집을 심리적으로나마 넓힐 수 있도록 집 근처에 거점공간들을 두고 집이 해결해 주어야하는 다양한 기능들을 소화하는 것이다. 멀리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슬세권에서 집과 일터가 아닌 제3의 공간으로서의 거점 공간을 만들고 있다. 코로나 시대를 슬기롭게 버텨나가며 공간의 유연함을 경험한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거점 공간을 늘리기도 줄이기도 한다. 집에 버젓이 세탁기가 있는데도 빨랫감을 들고 빨래방으로 향하고, 원거리 대형마트 장보기 대신 동네 로컬푸드 직매장을 활용하는가 하면, 집무실 삼은 카페에서 원격수업이나 재택근무에 필요한 컨퍼런스 콜을 해결한다.
 
트렌드터치 1/11

트렌드터치 1/11

‘동네’라는 단위도 ‘집 근처’로 작아지고 있다. 통상 도보 이동이 가능한 반경 500m 이내를 소매상권으로 보았으나 요즘 편의점과 동네슈퍼의 상권 반경은 200~300m로 축소되었다. 또 모바일상에서는 한두 발짝만 움직여도 경로가 잡히는 위치인식 기술의 섬세함에 사람들이 체감하는 공간의 이동이 점점 더 마이크로해지는 이유도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편의점은 동네 쇼핑의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1~2인 가구들의 식생활 정도는 가뿐히 해결해줄 수 있을 정도의 다양한 품목과 PB상품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잦은 방문과 반복 구매를 유도하는 진열과 서비스도 나날이 진일보하고 있다. 온라인 구매가 안되는 와인을 앱으로 서칭한 후 집 앞 편의점으로 배송시켜 구매하고, 세탁대행을 맡기는가 하면 선물을 집 대신 수령하는 곳으로 삼는 등 슬세권 홈라이프의 면모가 다채롭게 펼쳐지고 있다.
 
소소한 동네산책, 동네 카페에서의 원격수업, 로컬푸드 직매장과 편의점에서의 쇼핑, 당신의 근거리 마켓인 당근마켓 거래 등 집 근처에서의 라이프스타일이 재편되고 있다. 실제로 우리동네 골목 정보까지 상세하게 알려주는 당근마켓 같은 플랫폼은 슬세권 홈라이프의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소문난 맛집에 찾아가 대기행렬에 올라타는 것보다 슬리퍼 신고 나가서도 인스타그래머블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믿을만한 동네 레스토랑들, 이른바 로컬 크리에이터들을 찾는 슬세권 선호현상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집 앞까지가 생활반경이니 드레스코드 역시 홈웨어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원마일웨어가 인기다. 집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편안하면서도 적당히 예쁘기까지 한 원마일웨어가 기분전환의 요소로 작용하며 슬세권을 더욱 세련되게 만들고 있다.
 
장기화되는 코로나로 고립감의 피로도가 높아진 사람들은 어린시절 뛰어놀던 골목길은 아니더라도 우리집과 동네가 중첩되는 거점공간들을 만들어 지근거리 홈라이프를 즐긴다. 근처의 가치를 깨달아가는 사람들, 동네소비에 충실한 슬세권 홈라이프가 코로나 시대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고 있다. 집은 거주자의 정체성을 드러내주는 살아 있는 공간이다. 슬세권이 만드는 마이크로 로컬리티는 이제 거주자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또 하나의 요소가 될 것이다. 새해에는 코로나 블루도 극복할 겸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이향은 성신여대 서비스·디자인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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