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9〉
![1912년 1월 1일 밤에 열린 쑨원의 임시 대총통 취임식은 야간 촬영시설 미비로 영상자료를 남기지 못했다. 서화에 능한 동맹회 회원 위안시뤄(袁希洛)가 당시 기억을 더듬어 참석자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재현했다. [사진 김명호]](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101/09/c2f9e9d5-eebd-40d9-b5a9-c447eb00be31.jpg)
1912년 1월 1일 밤에 열린 쑨원의 임시 대총통 취임식은 야간 촬영시설 미비로 영상자료를 남기지 못했다. 서화에 능한 동맹회 회원 위안시뤄(袁希洛)가 당시 기억을 더듬어 참석자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재현했다. [사진 김명호]
청나라 황실의 부패·무능에 실망
즈파 군벌 출신으로 쿠데타 성공
쑨원, 펑위샹 거사를 의거로 평가
덩샤오핑 “펑 장군은 평생 애국자”
즈펑전쟁 승리자 장쭤린에 일격
베이징 정국은 오리무중 속으로
![항일전쟁 승리 후 펑위샹은 중국을 떠났다. 부인 리더촨(李德全)과 미국에 머무르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1946년 11월, 뉴욕 센트럴파크. [사진 김명호]](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101/09/1b12ef23-702f-443f-8bc7-9fd64756d693.jpg)
항일전쟁 승리 후 펑위샹은 중국을 떠났다. 부인 리더촨(李德全)과 미국에 머무르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1946년 11월, 뉴욕 센트럴파크. [사진 김명호]
결혼과 함께 펑위샹의 위상도 달라졌다. 처삼촌 덕에 좋은 보직을 도맡아 했다. 청소년 시절부터 군 생활 하다 보니 뇌리에 충군(忠君) 사상이 가득했다. 광시제(光緖帝)와 즈시가 병사하자 기이한 행동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3일 밤낮을 한자리에 앉아 통곡만 해댔다.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안 잤다. 충성심보다 엄청난 체력에 감탄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부하가 늘어나자 세상 보는 눈이 밝아졌다. 하늘처럼 알던 청나라 정부의 부패와 무능에 실망했다. 동료들과 무학연구회(武學硏究會)라는 정치조직을 만들었다. “우한(武漢)이 시끄러우면 온 중국이 시끄럽다”는 옛말은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1911년 10월 10일, 군사 요충지 우한삼진(武漢三鎭)에 주둔 중인 남양신군(南洋新軍)이 혁명군 깃발을 내걸었다. 펑위샹이 이끌던 무학연구회도 호응을 모의했다. 1911년 1월 1일 0시 정각, 쑨원이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거사는 이틀 만에 실패했다. 펑은 체포됐지만 루젠장의 인척이라 금세 풀려났다. 군 복직도 별문제가 없었다. 3년간 근신하며 경력을 쌓았다. 든든한 자산이 될 여단장이 되자 조심스럽게 기지개를 켰다. 쑨원은 펑위샹의 거사를 의거(義擧)라며 높이 평가했다. 인편에 박애(博愛) 두 글자를 휘호해서 보냈다.
![국민군은 1927년 4월 말, 국민혁명군에 편입됐다. 흔히들 서북군이라 불렀다. 국수 먹는 서북군 사병. [사진 김명호]](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101/09/d3f693e0-43b2-4e7b-a62d-722cc6960479.jpg)
국민군은 1927년 4월 말, 국민혁명군에 편입됐다. 흔히들 서북군이라 불렀다. 국수 먹는 서북군 사병. [사진 김명호]
펑위샹은 정신교육을 중요시했다. 모아놓고 직접 시켰다. 3시간이 넘는 경우가 허다했다. 1975년 타이완에서 사망한 전 국민당 육군상장(上將) 류루밍(劉汝明·유여명)의 회고록에 이런 구절이 있다.
국민당 이끈 쑨중산 혁명사상 옹호
“펑위샹은 봉건사상과 농민의식이 묘하게 뒤섞인 복잡한 사람이었다. 군사훈련보다 정신교육에 더 치중했다. 타고난 무골이다 보니 명확한 정치관이 있을 리 없었다. 훈시 내용이 산만했다. 무슨 말인지 모를 때가 많았다. 봉건적인 윤리와 도덕, 애국을 강조했지만 애국에 대한 설명은 수시로 달랐다. 박애와 희생을 역설할 때는 기독교 목사 같았다. 군관 상대로 특강을 세 차례 했다. 효도와 애민(愛民), 보불전쟁 때 프랑스 국민의 애국적인 행동이 주제였다. 내용이 어수선하고 앞뒤가 안 맞았다. 당시에는 참 별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갖 풍파 겪으며 많은 사람 만났지만 애국이 뭔지 딱 부러지게 설명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애국은 실천이라는 것을 깨닫자 말이 생각을 따르지 못했던 장군이 그리웠다. 덩샤오핑(鄧少平·등소평)은 펑 장군의 일생을 애국자라는 한마디로 정의했다. 맞는 말이다. 장군은 죽는 날까지 애국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베이징정변에 성공한 펑위샹은 즈파와 결별했다. 군대 명칭도 중화민국국민군(中華民國國民軍)으로 바꿨다. 외국 기자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정변이 아닌 혁명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쑨중산 선생의 혁명사상을 옹호한다. 선생을 베이징으로 모셔 오기 위해 동지들과 수도혁명을 단행했다. 중산 선생은 국민당의 영도자다. 우리의 대오도 국민군이 당연하다. 선생은 소련의 지원으로 공산당과 연합했다.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통일을 위한 혁명군 양성에 돌입했다. 국민군과 합세할 날이 머지않았다.”
즈펑전쟁의 승리자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은 어이가 없었다. 정국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