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더오래]퇴사 기념 이벤트로 선택한 서울 성곽길 걷기

중앙일보 2021.01.07 15:00

[더,오래]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53)  

2021년이 시작됨과 동시에 새로운 일상이 시작됐다. 작년 12월 31일 자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몇 개월 동안 고민한 이후였다.
 
“올 한 해 많은 것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꼭 가져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됐다고 할까요. 건강이 첫 번째라는 걸, 가족과 친구, 동료가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라는 걸, 믿음을 가지고 응원하며 나아가는 것이 어려운 상황을 지탱하는 데 정말 필요하든 걸 말입니다. 또 어떤 환경에 놓이더라도 원하는 삶의 모습과 가치를 지키며 답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도요. 이것들만 가지고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원래 모습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우먼센스 편집장으로 지낸 지난 2년간 3050 여성의 관심사와 열정, 바람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소중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 우먼센스 바깥에서 여러분과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어느 곳에서든 여성이 만들어내는 세상, 그 세상을 더욱 빛나게 만들 센스의 힘을 잊지 않으면서요.”
 
2021년 신년호 마지막 편집장 글이다. 오랜 전통의 여성 매거진인 우먼센스에서 찐하게 잡지를 만들었던 지난 2년의 세월 동안 배운 것이 많았다. 사람은 평생 배우고 산다더니 50대에 들어서도 새로운 상황이 펼쳐지고, 그것을 통해 단련되고 성장한다.
 
50대에 퇴사하는 것이 생각보다 정리가 빨리 됐다. 새로운 문이 열린 것이다. [사진 Krystal Black on unsplash]

50대에 퇴사하는 것이 생각보다 정리가 빨리 됐다. 새로운 문이 열린 것이다. [사진 Krystal Black on unsplash]

 
디지털 플랫폼이 주요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된 지금 정통 미디어를 운영하려면 변화와 혁신이 필요하다. 우먼센스 역시 32년 전통의 여성잡지라는 자리에서 그 길을 모색했고, 새로운 방향을 설정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26년 차 잡지 에디터로 그 과정을 보냈다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더 늦기 전에 해보고 싶은 다른 일을 시작하려는 때문이다.
 
1994년 잡지 기자로 일을 시작해 지금까지 딱 두 번 일을 멈추었다. 40대 후반에 한번, 그리고 지금인데, 그때와 비교해 보니 마음가짐이 참 다르다. 불과 몇 년 전이었는데 말이다. 그때는 멈췄던 그 자리와 비슷한 위치와 규모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만두자마자 바쁘게 움직였던 것도 그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편하다. 50대가 되어 더 조급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제는 속도도 규모도 내가 정하고, 방향과 지속성도 내가 고민하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오히려 여유가 생긴다. 관심사를 좁히고, 의미에 집중할 수 있는 일 말이다. 50대가 되니 곁가지가 쳐지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더 잘 보인다고 할까. 마지막 에디터 노트에 쓴 대로 말이다.
 
퇴사 기념 이벤트로 한양도성 성곽길을 걸었다. 걸어보니 잊고 있었던 길, 못 보고 지나쳤던 곳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진 김현주]

퇴사 기념 이벤트로 한양도성 성곽길을 걸었다. 걸어보니 잊고 있었던 길, 못 보고 지나쳤던 곳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진 김현주]

 
출근을 안 한 지는 며칠 안 되었지만 급하게 달릴 때는 못 봤던 것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정리 중이다. 퇴사 기념으로 나를 위한 즐거운 일 하나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서울 한양도성 성곽길을 걷기로 했다. 처음 조성됐을 때부터 가봐야지 생각은 했었지만, 시간이 안 난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코스였다. 동대문에서 시작해 광희문, 남산, 숭례문, 돈의문 터, 인왕산과 창의문, 백악과 숙정문, 혜화문과 낙산까지 며칠에 거쳐 한 바퀴를 돌았다. ‘서울에 이런 길이 있었구나’, ‘조선시대 성곽이 이런 모습으로 곳곳에 남아 있었네’, ‘성안과 성 밖의 차이는 이렇구나’ 등 혼잣말을 하며 즐겁게 걸었다. 성곽길 꼭대기에서 바라본 서울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 안에 파묻혀 바쁘게 움직일 때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일해온 모습도 마찬가지니라. 아름다웠고, 의미 있던 한 막을 덮고, 이제 또 다른 막이 시작된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는 걸 경험하고 있는 지금, 나는 성곽길 꼭대기에서 느낀 것처럼 아주 상쾌하다.
 
전 코스모폴리탄·우먼센스 편집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공유하기
김현주 김현주 전 코스모폴리탄·우먼센스 편집장 필진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 전 코스모폴리탄 편집장, 현 우먼센스 편집장. 20~30대 여성으로 시작해 30~40대 여성까지, 미디어를 통해 여성의 삶을 주목하는 일을 25년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나이 또래인 50대 '갱년기, 중년여성'의 일상과 이들이 마주하게 될 앞으로의 시간에 관심을 갖고 있다. ‘더오래’를 통해 여성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호르몬의 변동기인 이 시기를 어떻게 하면 즐겁게 보낼 수 있을지 모색하며 동년배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려 한다.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