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앙시평] 죄인의 민주주의

중앙일보 2021.01.06 00:45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죄성(罪性)과 유한함을 이렇게 고백했다. 이는 초월자의 밝은 빛 앞에서 존재와 심성의 비천함을 깨닫는 우리 인간의 공통된 고백일 것이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을 대망하고, 불교와 유교는 깨달음과 수양을 통해 인간의 비약을 소원한다. 겸손과 절제, 비판을 기꺼이 수용하는 마음이 여기서 배태되며, 견제와 균형, 포용, 성찰이라는 민주주의 정신도 이 마음에서 자란다.
 

죄인의 마음이 겸손과 절제 낳아
민주주의 정신도 여기서 비롯돼
의인인 양 행동하는 여당과 친문
민주주의 근간 허물고 있지 않나

민주주의는 죄인을 위한 제도다. 사익보다 공익을 우선하고 지혜와 지식까지 갖춘 의인(義人)이 있다면 독재가 민주주의보다 나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자격을 갖춘 자는 매우 드물다. 권력을 가졌을 때 그가 변심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설혹 이런 자가 통치한다 해도 평범한 세상이 그의 비범함을 따라줄지 의문이다. 애덤 스미스가 자본주의는 위인이 아니라 범인(凡人)을 위한 제도라 말했듯이 민주주의는 의인이 아니라 평인(平人)의 제도다. 이 두 제도가 발전적이고 견고한 것도 인간의 자기중심적 편향과 유한함을 인정하고 경쟁과 견제를 통해 사회의 균형을 잡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의인과 죄인이란 잣대로 나누는 정치는 견제와 균형을 파괴한다. 죄인의 민주주의는 우리 모두 유한하며 부족하다는 평등의 정신에 기초한다. 통치자 자신도 사욕의 노예가 될 수 있음을 알기에 그를 견제하는 기관과 제도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권력자가 스스로는 의인, 그를 반대하는 자는 악인이라 믿으면 민주주의는 위험에 빠진다. 자기들을 의인이라 믿는 권력 집단이 다수파가 되면 ‘다수의 폭정(tyranny of the majority)’이 일어나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이런 점에서 일부 여당 의원과 친문(親文)세력의 행동은 지극히 위험하다. 사법부, 검찰, 감사원이 정치 권력과 행정부를 견제하는 것은 민주주의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다. 아무리 좋은 명분이 있다 해도 이러한 견제와 균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집행하는 것이 민주주의 원칙이다. 그런데 잘 알려진 이유로 여당 의원이 감사원장을 압박하고, 친문세력은 판사를 탄핵해야 한다고 청원한다. 검찰총장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행동한다. 마치 의인의 권좌에 앉아 죄인을 심판하듯 한다. 누가 이들을 의인으로 칭했나. 예수님인가, 공자님인가, 부처님인가. 예수님이 그랬다면 군림이 아니라 섬기는 자가 돼야 할 것이고, 공자님이라면 공치천하(共治天下)를 해야 한다며 권력자를 오히려 견제할 것이고, 부처님이라면 권력을 부질없다고 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그 반대다.
 
여당이 의인 집단이 아님은 공당(公黨)의 식언(食言)이 습관화된 데서도 드러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할 때 위성정당을 창당하지 않겠다는 중대한 약속을 깬 것이 그 예다. 더 추한 것은 올 4월 서울과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후보를 내기 위해 당헌을 개정한 것이다. 이로써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가 중대한 잘못으로 직위를 상실하더라도 해당 선거구에 후보를 추천할 수 있게 됐다. 이는 공당이 국민에게 한 약속을 정치적 득실에 따라 마음대로 뒤집은 것이다. 마이클 샌델은 경제적 이익보다 규범을 우선해야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고 했는데 집권 여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도덕적 가치를 팔아 치우고 있다.
 
여당이 이런 행동을 하는 배경에는 열성파 친문세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적 선호를 갖는 것은 시민으로서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나치 정권과 같이 중대하고 명백한 악에 반대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자기 진영이 마치 절대적 선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열린 사회의 적이다. 그 의도하지 않은 피해는 극심한 정치·사회 갈등으로 나타나고 정책 혼란으로 이어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한꺼번에 망가뜨린다.
 
이런 한국 상황은 필자가 경험했던 영국 시민의 태도와 너무 다르다. 2000년 영국의 공립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옥스퍼드대 입학에는 실패했지만 하버드대엔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사립학교 출신이 아니어서 차별받았다는 투로 지역신문이 이를 기사화하자 그 당시 토니 블레어 정부 각료들은 앞다투어 옥스퍼드대의 엘리트주의를 비난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반응은 오히려 노동당 정부에 냉담했다. 계급차별 심리를 부추겨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꼼수라는 것이었다. 고상한 품성을 지닌 블레어 총리도 감시해야 할 대상이지 추앙해선 안된다는 믿음이 영국 민주주의의 바탕이었다.
 
민주주의는 승패만 있는 전쟁터가 아니다. 죄인의 정신이 없으면 말라 죽는 연약한 식물이다. 우리는 죄인의 성찰과 절제로 민주주의를 키우고 있나, 아니면 의인의 오만으로 이를 갉아 먹고 있나.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그의 책,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이렇게 묻는다. “정치적 연대의 이완에 비례해서 윤리적 연대가 강화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 사회가 어떻게 파멸을 피할 수 있을까.” 평등한 죄인이란 연대를 잃으면 한국의 민주주의에 무엇이 남겠는가. 새해에는 모두 죄인답게 민주주의 하자.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