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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처럼 살지 말라" 현각 스님의 '현각 쇼' 고백
백성호의 현문우답

"연예인처럼 살지 말라" 현각 스님의 '현각 쇼' 고백

중앙일보 2021.01.05 05:00
백성호 기자 사진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풍경1

백성호의 현문우답

 
출판사에는 ‘베스트셀러 작가’를 만들기 위한 나름의 공식이 있습니다. 그중에 아주 유명한 공식이 하나 있습니다. 첫째 조건은 독신 수도자입니다. 출가해서 홀로 살아가는 수도자는 어쩐지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둘째 조건은 얼굴이 잘생긴 훈남 혹은 미남입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갖추면 ‘준연예인급’의 가능성을 갖추게 됩니다. 여기에 마지막 결정적인 조건이 하나 필요합니다. 다름 아닌 ‘하버드’입니다. 세계 최고의 명문, ‘하버드’라는 간판이 여기에 가세하면 공식은 비로소 완성됩니다.  
 
 
유명 출판사의 한 대표는 제게 “이 세 가지 공식만 갖추면 백발백중”이라고 말했습니다. 초대형 베스트셀러를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이 공식을 충족하며 등장한 첫 번째 작가가 다름 아닌 현각 스님이었습니다. 그는 하버드대에서 숭산 스님(1927~2004) 의 초청 강연을 듣다가 “너는 누구인가?”라는 말에 충격을 받고 출가한 독신 수도자입니다. 얼굴도 무척 잘 생겼습니다. 미국 예일대를 졸업한 뒤 하버드대 신학대학원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했습니다. 현각 스님은 베스트셀러 공식의 모든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여기에다 특별 점수까지 갖추었습니다. 그는 미남에다 푸른 눈의 외국인이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대성공이었습니다. 현각 스님이 쓴 책은 『만행』입니다. 책의 부제는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였습니다. 무려 100만 부 이상 팔린 밀리언셀러가 됐습니다. 덩달아 현각 스님의 지명도도 한껏 올라갔습니다. 졸지에 현각 스님은 ‘연예인급’이 돼 버렸습니다. 불교계 인사 중에 성철 스님과 법정 스님을 제외하면 그 정도의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젊었습니다.  
 
#풍경2
 
그렇다고 현각 스님이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는 아니었습니다. 불교에는 하안거와 동안거가 있습니다. 여름과 겨울, 석 달씩 산문 출입을 금한 채 선방에서 종일 참선을 해야 합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현각 스님은 안거를 무려 32차례나 지냈습니다. 꽉 채운 세월로만 따져도 꼬박 16년이 걸립니다. 그에게는 진리에 대한 목마름과 진지한 구도심(求道心)이 가슴 깊이 있었습니다.  
 
현각 스님이 안거를 마치고 선방을 나설 때마다 요청이 쇄도했습니다. 신문사와 방송사의 인터뷰 요청부터, 크고 작은 사찰들에서 법문 요청이 쏟아졌습니다. 대중은 환호했습니다. 심지어 안거를 해제하고 돌아오는 현각 스님을 위해 사찰에 환영 플래카드를 걸기도 했습니다. 절집 문화로 따지면 이런 식의 대중 반응은 상당한 ‘오버’이기도 했습니다. 절집 정서상 한 개인이 동안거를 마쳤다고 환영 플래카드를 거는 일은 없었으니까요.
 
 
현각 스님의 스승은 숭산 스님입니다. 한국 불교의 세계화를 위해 선구적으로 눈을 뜬 선사입니다. 숭산 스님은 일찌감치 이런 일을 우려했습니다. 하버드대를 떠나 이역만리 한국에 와서 머리 깎고 출가한 제자 현각에게 “한국어를 배우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녔습니다. 한국어를 알아야 주위 사람들과 소통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숭산 스님은 “한국어 배우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하루는 현각 스님이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왜 한국어를 배우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까?” 숭산 스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네가 한국말을 배우게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 한국 사람들이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스승은 앞날을 내다보며 제자를 걱정했습니다. 대중의 환호와 관심에 젖어서 휘둘리다가 자칫 구도자의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겁니다.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현각 스님은 결국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나중에는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될 만큼 유창하게 말했습니다.  
 
#풍경3
 
현각 스님은 작정하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2009년 9월 독일 뮌헨에 조그만 선방을 차렸습니다. 현각 스님이 한국 땅을 떠나기 직전에 만났습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밥집에서 그와 마주 앉았습니다. 현각 스님은 “한국에서 나는 그동안 연예인으로만 살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말은 깊은 속내에서 올라오는 고백이자 반성의 소리였습니다. 듣기 좋아라고 하는 말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참회는 진지했습니다.  
 
 
당시 현각 스님은 한국에서 많은 걸 가졌습니다. 누구나 그를 알아보고, 명예도 있고, 인기도 많고, 사방에서 그를 초청하지 못해서 안달이었습니다. 현각 스님은 그 모든 걸 내려놓겠다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 내려치는 강한 회초리였습니다. 현각 스님은 “제가 잘못했다. 유명해져서 여기저기 초청받으며 대접을 받았다. 그건 ‘현각 쇼’였다. 너무너무 부끄럽다”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한국 땅을 떠나서, 아무런 터전도 없는 곳에서, 초심으로 선방을 일구겠다. 필요하면 중국집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도 하겠다”고 했습니다. 숭산 스님도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세탁소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저는 ‘현각과 숭산의 첫만남’이 떠올랐습니다.  
 
#풍경4
 
현각 스님이 출가하기 전의 일입니다. 그는 숭산 스님과 처음 만났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힌 뒤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이야기, 어떤 공부를 했고, 쇼펜하우어를 통해 불교 사상을 처음 접하게 됐고, 요즘은 누구에게 관심이 있고,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등 구시렁 구시렁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말없이 듣고 있던 숭산 스님이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너는 누구냐~아아!”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대화하다가 그런 물음을, 그런 식으로 받아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그는 “그때 정말로 무서웠다. 진짜 굶주린 호랑이 앞에 제가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너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가까스로 대답을 했습니다. “제 이름은 ○○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 숭산 스님은 버럭, 다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건 네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이다. 그것 받기 전에는 이름이 없었다. 너는 누구냐~아아?”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저 멍했습니다. 그래서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숭산 스님은 “그것을 공부해라. 그것만 공부해라. 이제 책은 그만해!”  
 
나중에 현각 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날카롭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칼을 들고 다니는 아이였다. 숭산 스님은 그 칼을 제가 스스로 제 목에 겨누게 했다.” 이게 현각 스님이 “한국에서 나는 연예인이었다”고 고백하며 돌아가고자 했던 ‘초심’이었습니다.  
 
#풍경5
 
현각 스님이 독일로 떠나자 출판계는 ‘그다음 스타’를 물색했습니다.  ‘독신 수도자+미남+하버드’라는 베스트셀러 공식을 갖춘 저자를 말입니다. 현각 스님이 떠난 자리에서 혜민 스님이 그 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 출판사는 결국 초대형 베스트셀러를 터뜨렸고, 혜민 스님은 ‘스타 스님’이 됐습니다.  
 
 
얼마 전, 현각 스님은 혜민 스님에게 “연예인처럼 살지 말라”고 비판했습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현각 스님이 혜민 스님을 그렇게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혜민 스님에 대한 현각 스님의 비판은 아주 강한 회초리였습니다. 저는 그게 수행자로서 자신을 향해 먼저 내려쳤던 회초리이기에, 후배 출가자를 향해서도 내려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출가한 이유’를 망각하지 말고 길을 잃지 말라는 뜻입니다.  
 
현각 스님이 꺼냈던 단어와 표현만 보면 차갑고, 매섭고, 무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서 “한국어를 배우지 마라”며 제자를 미리 염려했던 숭산 스님의 마음을 읽습니다. “출가 수행자가 연예인처럼 살지 마라!” 저는 이보다 따듯한 회초리를 본 적이 없습니다.  
 
글=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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