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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생 뛰어난 ‘회식 황제’ 이두식, 술 마신 뒤 물냉면 순례

중앙선데이 2021.01.02 00:21 718호 22면 지면보기

예술가의 한끼

호방한 성격의 이두식은 술자리에서 자신이 술값을 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사진 이두식 유족]

호방한 성격의 이두식은 술자리에서 자신이 술값을 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사진 이두식 유족]

1962년 서울 정동 이화여고 4층에 세 들어 있던 서울예고의 입시장에 엉뚱한 소년이 나타났다. 그해의 데생 시험은 비너스상 그리기였다. 대부분의 수험생은 미술학원에서 배운 대로 비너스의 가슴 윗부분만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한 소년이 비너스의 두상과 가슴 아래는 물론 안 그려도 되는 석고의 밑받침까지 죄다 정밀묘사하듯 꼼꼼하게 다 그리고 있었다. 소년이 그린 비너스는 결국 얼굴이 아주 작은 이상한 그림이 되고 말았다.
 

6·25 피란민 많은 경북 영주 출신
고향 찾아가듯 을지·필동면옥 단골

후배 송창식·이장희 등과 어울려
70년대엔 형편상 ‘이발관 그림’도

술자리에선 술값 내야 직성 풀려
큰 덩치만큼 씀씀이도 커 호방

데생 시험 감독관인 김병기(1916~ )는 소년의 그림이 재미있고 정직하다며 후한 점수를 줬다. 덕분에 소년은 무난히 서울예고에 입학할 수가 있었다.  
 
소년 이두식(1947~2013)은 이날 석고상이란 걸 생전 처음 보았다. 경북 영주에서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소년에게 그림의 대상은 산과 들과 마을로 다니며 본 집과 풍경이 전부였다. 미술학원도 석고상도 영주에는 없었다.
 
이두식의 부친은 막내아들이 화가가 되길 원했다. 가을에 경복궁에서 열리는 국전을 아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부자는 새벽에 영주역을 출발하면 8시간 달려 청량리역에 도착하는 열차 여행을 해마다 빠지지 않고 했다.
  
이장희가 아현동에 아틀리에 마련해줘
 
호방한 성격의 이두식은 술자리에서 자신이 술값을 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사진 이두식 유족]

호방한 성격의 이두식은 술자리에서 자신이 술값을 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사진 이두식 유족]

그의 부친은 영주에서 하나뿐인 사진관을 운영했다. 1920년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을 공부한 부친 덕에 이두식의 삼촌들도 대구 등지에서 사진관을 했다. 흑백 사진의 기법 중에 인물을 멋있게 표현하기 위해 필름 위에다 연필로 음영을 주는 리터치 작업이 있다. 포토샵과 비슷한 작업이다.
 
중학생 이두식은 부친의 어깨너머 배운 기술로 리터치 작업을 해 보았다. 필름에 연필을 살짝 묻히면 눈동자가 반짝반짝 살아나고 이목구비가 뚜렷해졌다. 나이가 들어서 사천왕상처럼 얼굴이 우락부락해진 이두식이었지만 소년과 대학생 시절의 이두식은 전혀 다른 용모였다. 눈동자가 영롱하게 빛나는 미소년 중학생 시절의 인물 사진을 늘 지갑 안에 넣어 다니다가 가끔 꺼내어 주변 사람들에게 소년 시절의 부드러운 용모를 자랑했다.
 
서울예고에 입학한 첫해의 담임은 화가 문미애(1937~2004)였다. 이두식은 김창렬(1929~ )에게서 호된 데생 수업을, 김병기에게서 자상한 미술사 수업을 받았다. 이두식의 서울예고 동기로는 조각가 박충흠, 동양화가 오용길 등이 있다. 서울예고 한 해 후배로는 가수 송창식이 있다. 청년 이두식은 송창식, 이장희 등과 친했다. 이미 유명가수였던 이장희는 이두식의 패트런을 자처하여 아현동 고개에 살림집 겸 아틀리에로 쓸 공간을 마련해 줬다.
 
홍익대 서양화과 후배인 지석철(왼쪽)과 함께한 이두식, 일본 니꼬, 1983년. [사진 이두식 유족]

홍익대 서양화과 후배인 지석철(왼쪽)과 함께한 이두식, 일본 니꼬, 1983년. [사진 이두식 유족]

생활은 안정적이지 못했다. 미술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봤다. 1970년대에는 일명 ‘수출화’를 7년 가까이 손댔다. 이발관 그림이라 불리며 삼각지 등지에서 제작되던 그림이었다. 다행히 이두식에게 주어진 건 유트릴로, 시슬레 등 일류 화가의 모사품이었다. 인상파풍의 창작품도 해냈다. 그 덕분에 조악한 손기술이 붙는 걸 막을 수는 있었다. 극장 간판, 가수들의 앨범 자켓, 영화의 아트 디렉터, 신문 연재소설의 삽화 등도 척척 해냈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만의 작업세계를 잃지 않으려 밤늦은 시간까지 자신이 납득할 만한 수준의 그림을 그리려 애썼다. 그는 데생 능력이 뛰어났다. 미대 입시 준비를 하는 학생들에겐 인기가 많았다. 입시생들에겐 아현동 아틀리에가 선망의 대상이었다.
 
홍익대 서양화과 후배인 지석철(1953~)이 군대 휴가 중에 아현동 아틀리에를 찾았다. 이두식의 서울예고 동기이자 부인인 손혜경이 함께 지석철을 맞았다. 휴가 나온 군인에게는 적어도 짜장면쯤은 대접해야 한다며 돈을 꺼내려 하는데 지갑이 비어있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10원짜리 동전을 긁어모으니 겨우 두 사람의 짜장면 값은 됐다. 벌이와는 달리 살림은 늘 아슬아슬했다. 사람들을 잘 챙기는 데다 술자리에선 무조건 자신이 술값을 다 내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이두식의 성격 때문이었다.
 
이두식의 ‘축제’(2009년),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x250㎝. [사진 지석철]

이두식의 ‘축제’(2009년),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x250㎝. [사진 지석철]

이두식은 1973년 문을 연 광화문의 레코드 가게 올리버를 자주 들렀다. 가게는 새문안로를 건너는 육교의 남단, 옛 경기여고로 가는 길 입구에 있었다. 두 사람이 겨우 서 있을 만한 정도의 좁은 가게였지만 젊은 예술가들의 약속장소로 애용되었다. 이두식, 송창식, 이장희, 소설가 최인호, 영화감독 이장호, 가수 현경과 영애 등이 올리버의 단골이었다.
 
이두식은 홍익대 교수가 되고 학장이 됐다. 미술계의 여러 직책을 맡았다. 점점 바빠졌다. 이두식은 회식의 황제였다. 오랫동안 회장을 맡은 미술단체 오리진의 회식 때는 으레 그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두식이 유심초의 ‘사랑이여’를 부르고 지석철이 ‘물방아 도는 내력’을 일명 ‘빠바리송’ 버전으로 이어받으면 파티는 절정에 올랐다. 신이 더 나면 이두식은 이주일이나 선배 교수들의 흉내를 내거나 병신춤을 추었다. 데생하듯 특정인의 신체와 동작의 특징을 잘 잡아내는 데다 성대모사에 능했다. 그가 나타나는 자리는 늘 흥겨웠다.
 
이두식은 몸짓으로 퍼포먼스를 보여 주는 걸 좋아했다. 밤늦게 자신의 아틀리에로 사람들을 불러 놓고 그림을 얼마나 빨리 잘 그리는가 시범 보이는 걸 즐겨 했다. 후배들에겐 자신의 손을 만지게 했다. 천부적인 예술가만이 가질 수 있는 부드러운 손이라고 자랑했다. 그의 나르시시즘은 어이없는 익살에 가까웠기에 밉지가 않았다.
 
이두식은 물냉면을 좋아해 을지면옥, 필동면옥을 자주 찾았다. 가끔은 의정부까지 냉면 순례를 했다. 이두식의 조부는 한·일 합방 이후 텅스텐광산 일에 관여했기에 광산이 있는 영주 풍기로 와서 정착했다. 6·25 전쟁이 끝나자 이번에는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에서 온 수많은 월남민이 풍기에 정착했다. 영주는 경북에서 피란민이 가장 많이 정착한 지역이 됐다. 그들이 가져온 냉면 문화 덕에 영주와 풍기는 본격적인 냉면의 고장이 됐다.
  
갑자기 세상 뜨자 2000명 넘게 조문
 
이두식이 서울의 냉면집을 찾는 일은 고향을 찾아가는 일이나 다를 바 없었다. 돼지고기 편육에 소주를 마신 다음 천천히 물냉면을 삼켰다. 주량이 남달랐다.
 
이두식은 요리와 식재료의 가치를 중하게 여겼다. 재일화가 이우환의 가마쿠라 자택을 처음으로 찾아갈 때다. 선배 화가에게 인사로 뭘 사 갈까를 고민하다가 100만원을 들여 최고급 마쓰자카 와규(和牛) 1kg으로 결정했다. 이두식은 덩치도 컸지만 먹는 데 씀씀이의 통도 컸다.
 
식사할 땐 격식을 따졌다. 젓가락을 들고 얘기하는 것, 종업원이 그릇을 소리 내며 던지듯 놓는 것을 싫어해 그 자리에서 지적했다. 이두식의 영주 고향집에서는 수건마다 가족의 이름을 따로 적어 놓고 각자 제 수건만 써야 했다. 청결이 몸에 밴 깔끔한 성격이면서도 주변 사람들에겐 호방했다. 미술계에서 이두식의 술을 얻어 마시지 않은 사람은 드물었다.
 
이두식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서울성모병원 빈소에는 2000명이 넘는 조문객이 문상하며 그의 사라짐을 슬퍼했다. 그가 베푼 호방함에 답하는 도리였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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