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순천 금둔사 매화가 꽃을 피웠다. 예년보다 한 달 정도 이른 납월매 개화 소식이다. 혹독한 추위에도 꽃을 피우는 매화가 대견하다. 등에가 꽃에 내려앉은 찰나를 포착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방신(芳信) : 꽃 피는 소식
지허스님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엄동설한에 핀 매화가 대견했겠지만, 워낙 소년처럼 맑은 스님이다. 핸드폰 너머로 붉은 매화 앞에서 환히 웃는 스님의 얼굴이 그려졌다.
순천 금둔사에 활짝 핀 홍매
꽃가루 지켜 벌이 날아들게
추우면 꽃잎 오므려 꽃술 보호
“겨울 매화가 향이 더 진한 법”

금둔사 지허스님. 폐허가 된 금둔사를 다시 일으키고, 매실나무 씨앗을 받아 심어 지금의 매실나무를 키운 주인공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2월 24일. 다시 전화를 넣었다. 스님 목소리에서 반가운 기색이 전해졌다.
“희한한 일이제. 며칠 전 겁나게 추웠을 때 있지 않았능가. 여그는 산속이어서 영하 16도로 떨어지고 그랬어야. 그때 꽃망울이 올라오더라고. 지금은 몇 개가 열렸고. 아직은 쬐만해. 그래도 이게 어디여. 고맙지, 기특허고.”

금둔사 매화는 잎이 붉어 홍매라 불린다. 홍매 중에서도 음력 섣달에 피는 홍매를 납월매라 한다. 여느 매화보다 향이 진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크리스마스 날 확 펴 부렸당게. 나가 야들을 심은 게 35년 전이여. 여태 이렇게 일찍 핀 적이 없었네. 음력으로 12월 8일이 성도일이여. 석가모니가 도를 깨친 날. 용하게도 그날은 꼭 매화가 피었는디, 올핸 한 달이나 먼저 펴 부렸네. 이게 뭔 조화당가?”
금둔(金芚) : 부처가 발아하다

금둔사 대웅전. 선암사 승선교처럼 생긴 돌다리를 건너면 대웅전으로 이어진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절은 작아도 역사는 길다. 백제 위덕왕 30년(서기 583)에 창건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제법 번창했었다. 통일신라 시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불상과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모두 보물로 지정됐다. 금둔사의 명맥이 끊긴 것은 정유재란(1597) 때다. 난리 통에 가람이 전소했다. 이후 금둔사는 오랜 세월 폐사지였다. 1970년대까지 산 아래 주민이 금전산 중턱 절터까지 올라와 밭농사를 지었다.

금둔사 삼층석탑으로 오르는 지허스님 뒷 모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금둔사 삼층석탑. 석탑 뒤에 서 있는 석조불상에 차를 올리는 모습이 조각돼 있다. 통일신라 시대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945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가지를 가져다 심으면 길어야 40년 밖에 못 사네. 씨앗이 싹을 틔우면 백 년도 넘게 살고. 매화 보면 어떤 생각이 드냐고? 그렇게 기다리던 꽃이 피니 반갑제. 고맙고 반가운디, 부끄럽네. 65년 중노릇을 했는데 여직 화두를 못 풀었잖어. 이놈들은 풀었고. 시방은 매화가 부처네. 화두를 풀면 부처가 되니게. 금둔사(金芚寺)가 부처가 싹을 틔우는 절이란 뜻이여.”
선농일치(禪農一致) : 노동이 수행이다

지허스님이 꽃망울을 터뜨린 매화를 바라보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혼자 살어. 혼자 다 하제. 농사짓고, 밥 해묵고, 땔감 허고. 팔십 노인이 땔감 하러 산을 다닌당게. 밥, 국. 김치. 이렇게 세 개 놓고 먹는데 맛있어. 밥은 팔십 년을 먹어도 맛있어.”

지허스님이 팬 장작이 수북히 쌓여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금둔사에는 대웅전 옆에 밭이 있다. 배추와 고추 따위를 심었다. 지허스님이 손수 기른다. 손민호 기자
“코로나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의심한다고 들었네. 나 같은 중에게는 정말 창피한 얘기네. 불교가, 아니 종교가 하는 일이 사람들이 마음을 바로 쓰게 하는 것인디. 지금 그렇지 못하다는 것 아닌가. 싸워야 할 건 사람이 아닌디. 안타깝네. 부끄럽고.”
지허스님은 차(茶)의 대가다. 선암사 동구 그 유명한 차밭을 만든 주인공이다. 여전히 그는 찻잎을 따고, 차를 덖고, 차를 내는 과정을 혼자서 다 한다. 금둔사 주위에도 1만 평(약 3만3000㎡) 규모의 차밭을 일궜지만, 4년쯤 전 넘어져 갈비뼈를 다친 뒤로 예전처럼 많이 만들진 못한다. 스님이 차를 내주었다. 여운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 향과 맛이 매화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납월매(臘月梅) : 섣달의 매화

금둔사 매화. 잎 한 장 없는 앙상한 가지에 피어난 붉은 꽃이 곱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매화는 꽃 중의 꽃이다. 예부터 난초·국화·대나무와 함께 사군자(四君子)로 불렸거니와 잎사귀 한장 없어도 도도히 꽃을 피우는 매화 앞에 옛 문사들이 기꺼이 찬사를 바쳤다. 이를테면 ‘백화괴(百花魁)’는 백 가지 꽃의 우두머리라는 뜻이고 ‘화형(花兄)’은 모든 꽃의 맏이라는 의미다.

금둔사 매화.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매화가 말여. 꽃이 피면 아무리 추워도 안 죽어. 추우면 꽃잎을 요래 오므려. 꽃 안을 지켜야 하니게. 꽃가루를 지켜야 벌레든 새든 날아드니게. 너무 헤프게 살아서 코로나가 온 것 아니겄어? 이제 좀 덜 다니고 덜 만나고 덜 먹어야 쓰겄제. 그렇게 버텨야지, 별수가 있겠는가? 그리움은 떨어져 있어야 생기네. 너무 가까이 있으면 소중한 걸 모르네.”
순천=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