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왜원조와 항미원조를 넘어
![임진왜란의 판세를 바꿔놓은 제2차 평양성 전투를 그린 ‘평양성 전투도’(부분). 1593년(선조 26) 1월 명나라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과 조선군은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1/01/5f3f8408-a6f2-4f27-8026-fde863584912.jpg)
임진왜란의 판세를 바꿔놓은 제2차 평양성 전투를 그린 ‘평양성 전투도’(부분). 1593년(선조 26) 1월 명나라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과 조선군은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한반도 도와준다”는 명분에 그쳐
실제론 일본·미국과의 대결 부각
한국인의 승리와 고통에는 눈감아
중국 중심주의 맞설 논리 세워야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병 파견을 주도한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왼쪽)과 조선에 원병을 이끌고 들어온 명군 제독 이여송(李如松). [사진 한명기]](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1/01/ecb46c46-be28-428f-8d53-ba0879d0259e.jpg)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병 파견을 주도한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왼쪽)과 조선에 원병을 이끌고 들어온 명군 제독 이여송(李如松). [사진 한명기]
그렇다면 차라리 명군을 조선에 들여보내 일본군과 맞서는 것이 유리했다. 요동은 평탄한 데 비해 조선은 국토의 상당 부분이 산으로 뒤덮인 나라가 아니던가. 중국의 입장에서 요동이 북경의 이(齒)라면 조선은 요동을 감싸는 입술(脣)이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다. 임진왜란을 맞아 명군은 ‘조선을 구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자국을 전쟁터로 만들지 않기 위해 조선에 참전했던 것이다.
닥치고 항왜원조(抗倭援朝)!
![한국전쟁 초기 압록강을 건너고 있는 중공군 대열.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1/01/e2d9446b-c441-471b-bcaa-e1f81f219e56.jpg)
한국전쟁 초기 압록강을 건너고 있는 중공군 대열. [중앙포토]
조선의 의사를 무시한 채 밀어붙인 강화 협상은 성과 없이 4년을 끌었다. 일본군은 경상도 일대에 웅거한 채 돌아가지 않았고, 명군은 싸울 의지는 없이 일본군이 북쪽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그저 견제만 할 뿐이었다. 그 세월 동안 조선 백성들은 일본군의 노략질과 명군의 횡포에 치여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명은 조선군이 일본군을 공격하는 것도 견제했다. 일본을 자극하여 협상의 판이 깨질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조선군 장수들은 일본군을 공격하려다가 명군 지휘부에 끌려가 곤장을 맞기도 했다. 참다못한 선조가 일본군과 빨리 결전을 벌여달라고 호소하자 명 조정에서는 선조를 국왕 자리에서 끌어내리자는 주장이 등장한다. 조선을 아예 명의 직할령으로 삼자고 외치는 자도 나타난다. ‘속국’ 조선이 ‘대국’ 명에게 전쟁 수행과 관련하여 이러쿵저러쿵하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자세였다.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참전이 조선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선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과 피해 또한 막심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오늘날 중국이나 대만에서 임진왜란을 항왜원조(抗倭援朝)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일본에 맞서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는 뜻이다. 임진왜란을 중일전쟁으로 치부하고, 조선에 은혜를 베풀었다고 자부하는 시혜자 의식이 물씬 풍긴다. 16세기 말 이래 중국에서는 임진왜란을 동사(東事)·왜사(倭事)·동원지역(東援之役) 등으로 불렀는데 ‘항왜원조’가 언제부터 공식 용어가 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시 닥치고 항미원조(抗美援朝)?
![2020년 중국이 항미원조전쟁 70주년을 기념해 상 영한 영화 ‘금강천’(金剛川) 포스터. [사진 한명기]](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1/01/c7dce10b-110d-476e-9608-c6862613b6f1.jpg)
2020년 중국이 항미원조전쟁 70주년을 기념해 상 영한 영화 ‘금강천’(金剛川) 포스터. [사진 한명기]
이윽고 10월 23일, 시진핑 주석은 항미원조 70주년 기념식에서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신중국의 안전과 인민들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참전했다”고 강조했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용전’을 부각하는 각종 영화와 애니메이션이 줄줄이 상영되고 참전 군인들의 무용담이 잇따라 소개됐다. 항미원조 전쟁을 강조하여 애국주의를 고취하고, 격화되고 있는 미국과의 대결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의도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1990년 중국이 항미원조전쟁 40주년을 맞아 발간한 화보집. 표지에 당시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彭德懷)의 모습을 실었다. [사진 한명기]](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1/01/37336174-96b8-4384-848d-5a2554c5bafa.jpg)
1990년 중국이 항미원조전쟁 40주년을 맞아 발간한 화보집. 표지에 당시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彭德懷)의 모습을 실었다. [사진 한명기]
‘항미원조’는 ‘미국에 맞서 북조선을 도운 전쟁’이란 뜻이다. 그런데 1592년의 ‘항왜원조’와 1950년의 ‘항미원조’의 시간 차이는 350년을 훨씬 넘는다. 하지만 중국의 눈에 비친 두 전쟁은 불과 글자 한 자 차이의 사건일 뿐이다. 임진왜란은 일본과의 대결이고, 한국전쟁은 미국과의 대결일 뿐이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과 중공군 사이에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사실에는 눈을 감는다.
‘항왜원조’ ‘항미원조’ ‘교량’ 등의 용어 속에는 지독한 중국 중심주의가 깃들어 있다. 두 전쟁의 당사자이자 최대 피해자인 조선과 남북한은 안중에도 없다. 한반도는 오로지 일본·미국과의 대결 장소로 치부될 뿐이다. ‘일본 오랑캐’와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한반도를 자신의 권역으로 묶어두어야 한다는 중국의 집요한 속내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날로 커지는 힘을 내세워 과거 역사까지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려는 중국의 기도에 맞설 수 있는 의지를 벼리고 논리를 개발하는 것이 절실한 시점이다.
조선 침략 반성하지 않는 일본
오늘날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뭐라고 부를까. 공식 명칭은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の役)’이다. ‘문록(1592∼1595), 경장(1596∼1602) 연간의 전쟁’이란 뜻이다. 얼핏 보면 대단히 중립적이고 무미건조한 느낌이 드는 용어다.
17세기 이후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조선 정벌’ ‘삼한 정벌’ 등으로 불렀다. ‘정벌(征伐)’은 ‘죄 지은 자를 토벌하여 응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 정벌’이 언제부터 ‘문록경장의 역’으로 바뀌었을까. 1910년 강제병합 뒤부터다. 일본인은 이제 한반도를 자신의 영토로 생각하게 됐다. 그러니 자신의 영토를 정벌했다는 말은 어딘지 어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고심 끝에 등장한 대체 용어가 ‘문록경장의 역’이다. 하지만 ‘문록경장의 역’에는 침략에 대한 반성의 기미는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요컨대 임진왜란을 둘러싼 역사 인식에서도 한·중·일 3국의 간극은 멀고도 깊다.
17세기 이후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조선 정벌’ ‘삼한 정벌’ 등으로 불렀다. ‘정벌(征伐)’은 ‘죄 지은 자를 토벌하여 응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 정벌’이 언제부터 ‘문록경장의 역’으로 바뀌었을까. 1910년 강제병합 뒤부터다. 일본인은 이제 한반도를 자신의 영토로 생각하게 됐다. 그러니 자신의 영토를 정벌했다는 말은 어딘지 어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고심 끝에 등장한 대체 용어가 ‘문록경장의 역’이다. 하지만 ‘문록경장의 역’에는 침략에 대한 반성의 기미는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요컨대 임진왜란을 둘러싼 역사 인식에서도 한·중·일 3국의 간극은 멀고도 깊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서울대 국사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조선시대 외교사, 대외관계사를 연구해왔다.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 『최명길 평전』 등을 썼다. ‘한명기의 한중일 삼국지’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명·청교체 격변기를 중심으로 한중일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른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