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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영의 시선] 우리에게 김명수 대법원장은 있는가

중앙일보 2021.01.01 00:17 종합 28면 지면보기
이가영 논설위원

이가영 논설위원

코로나19와 윤석열 검찰총장을 빼놓고 2020년을 설명할 수 있을까. 코로나19가 우리 사회 전반에 뉴노멀을 심었다면 윤 총장을 둘러싼 상황은 노멀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코로나19가 평소 누리던 일상에 감사를 느끼게 해줬다면 윤 총장 사태는 법과 상식, 절차적 정당성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했다. 그런 2020년을 관통하며 ‘시민의 자유’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라는 명제에 격하게 공감했다. 민주주의가 도전받고, 노골적으로 ‘피아 구분’과 획일주의를 강요당하는 상황은 권리 침해의 구제를 본분으로 하는 사법부로 시선이 닿게 했다.
 

법·절차 중요성 일깨운 사법부
판사 공격은 민주주의 파괴 행위
김명수, ‘묵언수행’ 별명 끝내길

2020년 마지막 한 달은 법원의 ‘위력’을 실감하는 계절이었다. 12월 첫날 조미연 판사는 윤 총장 직무배제를 집행정지하며 “총장은 소신껏 일하도록 임기가 보장됐다. 총장이 법무부 장관에 맹종하면 검사들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은 유지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추미애 법무장관은 문재인 대통령의 ‘절차적 정당성’ 특별 주문에도 불구하고 구성도, 과정도 허점투성이인 징계위를 강행했다. 징계위는 윤 총장에게 정직 2개월을 처분했지만 성탄 이브, 법원은 또다시 제동을 건다. 대통령의 결정을 존중하고 싶어도 징계 이유나 징계위 전반의 심각한 하자에 눈감을 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 하루 앞선 23일 법원은 조국 전 장관 부인 정경심 교수의 표창장 등 위조 혐의를 대부분 인정하고 징역 4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이후 여권 인사들과 정권 지지자들의 대대적 공격이 개시됐다. 탄핵 청원이 청와대 게시판에 올랐고, 인신 협박에 가까운 신상털기가 이어졌다. 법관 위협은 인류가 권력의 독재화를 막기 위해 고안한 삼권분립을 정면 부정하는 행위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는 “선출된 권력이 사법부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에 이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시민의 자유도 언제든 통제할 수 있다는 독재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대법원장의 입에 눈길이 쏠렸다. 2021년 신년사가 관심을 끌었지만 12월 31일 공개된 신년사는 맹탕으로 관련 언급은 없었다. “우리에게 대법원장이 있긴 한가. 부끄럽다”란 탄식이 곳곳에서 쏟아졌다.
 
권력자들이 법원을 못마땅해하고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고 법원을 핍박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삼권분립의 원칙과 법원을 지켜낸 꿋꿋한 대법원장들이 헌정사에 있었다.
 
해방 정국의 혼란과 6·25의 참상을 겪던 시절, 국민의 존경을 받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이승만 대통령 당시 대통령의 정적으로 꼽히던 의원이 자신을 살해하려 한 현역 육군 대위를 사살한 혐의로 기소됐다. 1심이 정당방위라며 무죄를 선고하자 이 대통령이 반발했다. 가인은 “판사의 판결은 대법원장인 나도 어쩔 수 없다. 절차에 따라 상소하라”며 해당 판사를 감쌌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엔 최종영 대법원장도 있었다. 노 대통령 집권 초 그는 법원행정처 차장 출신을 대법관에 내정했다. 대법원장 몫 제청이었다. 대법원 다양성을 원했던 노 대통령은 ‘비토’ 의사를 비쳤다. “이 지명을 철회하면 대법원장 역할을 할 수 없다. 나도 함께 물러나겠다.” 최 대법원장의 ‘통보’에 노 대통령은 뜻을 접었다.
 
현 김명수 대법원장은 2017년 9월 “저의 취임은 그 자체로 사법부의 변화와 개혁을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자부했다. ‘엘리트 법원의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지명을 통해 사법 권력의 교체를 알린 정권과 지지층은 법원을 믿었던 것 같다. 적폐수사의 일등 공신 윤석열 총장을 낙점하며 ‘우리 편’이라고 ‘착각’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와는 달리 시민의 권리 보호를 철학으로 지닌 대다수 판사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맘에 들지 않는 판결이 나올 때마다 여권 지지자들의 법관 공격은 정도가 심해져 갔다. 그럼에도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 김 대법원장에겐 ‘묵언수행’이란 별명이 붙었다. 김 대법원장은 심지어 윤 총장 정직 집행정지 신청 첫 기일이 열린 지난 22일 청와대 5부 요인 초청 간담회에 참석해 ‘중립성’에 의심을 받을 꼬투리를 제공했다.
 
2021년 우리에게 가인과 최종영 같은 대법원장이 있는가. 김 대법원장에게 이 글을 읽어 보라고 하고 싶다. “좌우, 진보 보수의 이분법적 사고와 진영을 앞세운 흑백논리의 폐해는 판결에 대한 합리적 비판을 넘어 급기야 법관마저도 이념의 잣대로 나눠 공격의 대상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대법원장으로서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온몸으로 막아내고, 사법부 독립을 확고히 하는 것이 국민의 준엄한 명령임을 한시도 잊지 않겠다.” 다른 누구도 아닌 김 대법원장의 2017년 9월 취임사 중 일부다.
 
이가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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