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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승진

중앙일보 2020.12.31 00:17 종합 29면 지면보기
한애란 S팀장

한애란 S팀장

연말 인사철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기업들은 승진자 명단을 발표한다. 눈으로는 누구 이름이 명단에 올랐는지 훑기 바쁘지만, 정작 마음은 명단에서 빠진 이름들에 쓰인다. 승진자가 있다는 건 누군가는 그 자리를 떠난다는 뜻이고, 동시에 누군가는 기대했던 승진에서 밀려났다는 뜻이다.
 
“내가 올해 올린 수주 실적이 얼마인데, 승진이 안 되다니. 회사가 개판이야.” 대기업 차장인 A는 드러내놓고 불만을 터뜨렸다. 최고의 성과를 올리고도 회사 내 역학 구도 때문에 본인이 속한 부문이 승진에서 대거 밀려났기 때문이다.
 
“매년 후보자 명단에만 오르니 이제 덤덤해요.” 임원 승진 문턱을 넘지 못한 B부장은 맥이 빠진 듯했다. 주변에서도 B의 승진을 기대했던 터라, 그의 승진 누락은 ‘왜 그렇게 성과를 내고도 안 되지?’라는 의문을 남겼다.
 
승진제도의 목표는 성과에 따른 보상을 통해 동기 부여를 하는 데 있다. 하지만 직급에 따른 보상 차이가 큰 기업일수록 성과보다 승진 자체가 목표가 돼버린다. 승진에 있어 실적보다 사내정치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기업이라면 쟁탈전은 더 치열해진다.
 
이런 경우 개인 입장에선 굳이 실패 위험이 큰 도전적 과제를 맡을 필요가 없다. 잘 굴러가고 있는 안정적인 프로젝트를 맡아 경력 관리를 하면서 인맥 관리와 로비에 힘쓰는 것이 최선이다. 창의적인 발상이 뿌리내릴 수가 없다. 사피 바칼이 저서 『룬샷』에서 “잘못된 인센티브가 조직을 망친다. 승진을 위해 싸우게 만드는 인센티브를 멀리하고 결과에 집중하는 인센티브를 만들어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그럼 아예 직급을 없애버리면 어떨까. 『룬샷』에서 전설 같은 룬샷(미친 아이디어)의 보고로 소개하는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이 그런 조직이다. 승진 사다리가 없으니 사내정치에 시간 들일 이유가 없다. 동료의 ‘또라이’ 같은 룬샷의 결점을 들춰내 깔아뭉갤 필요도 없다. 이곳에서 성과를 낸 직원이 받는 보상은 승진이 아닌 ‘동료들의 인정’이다.
 
너무 특이한 사례여서 일반화하기 어렵다고? 최근 SK이노베이션이 직급을 없애기로 했다. 사원·대리·과장·부장 직급을 PM(프로페셔널 매니저)으로 통일한다. 부장까지 승진제도도 폐지된다. 룬샷 육성을 위한 이 실험의 결과가 기대된다. 
 
한애란 S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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