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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김규식인가…“정치 양극화 극심, 그 통합정신 새길 때”

중앙일보 2020.12.31 00:03 종합 20면 지면보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시절의 이승만과 김규식(왼쪽부터) [중앙포토]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시절의 이승만과 김규식(왼쪽부터) [중앙포토]

우사 김규식. 1945년 해방 이후 이승만·김구와 함께 ‘우익 3거두’로 꼽히며 독립운동부터 남북협상까지 현대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올해 사망 70주기를 맞아 『우사 김규식 어록』(전 5권)이 나왔다.
 

70주기 『우사 김규식 어록』 발간
해방 후 좌우합작 시도한 중도우파
남북협상 추진하다 좌절, 정계은퇴

어려운 형편 때문에 언더우드 목사의 돌봄을 받은 그는 1894년 한성 관립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해 1896년 17세에 미국 유학을 떠났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해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을 창설했다. 1919년 4월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무총장이 됐고, 광복까지 임시정부의 활동을 이어갔다.
 
김규식은 중도 우익성향으로 좌파와도 연대하곤 했다. 이는 1946년 38선 이남에 좌우 연립정부를 세우려던 미국의 의도와도 맞아 한때는 미국에서는 이승만 대신 김규식을 지원하기도 했다. 냉전이 심화하며 결국 남북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1949년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을 추진하다 좌절하자 정계 은퇴했다. 1950년 6·25 전쟁 때 납북돼 그해 12월 평안북도 만포군에서 사망했다.
 
심지연

심지연

『우사 김규식 어록』 발간 작업을 한 우사 연구소의 심지연 경남대 교수를 30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활동에 비해 우사의 이름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미국과 소련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있었는데 이들에게 밀착하지 않은 탓이다. 좌익진영은 박헌영·김일성을 중심으로 소련에 기대었고, 우익에선 이승만과 한민당이 미국과 손을 잡았다. 반면 김규식은 외세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민족의 자체 역량으로 구심력을 키우려던 그의 구상은 냉전 강화와 미·소라는 원심력에 의해 무너졌다.”
 
일찍이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받았고 미국 유학생활을 했다. 이승만과 비슷한 환경인데, 미국과 거리를 둔 이유는.
“그는 1919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받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조선의 독립을 성취하고자 했다. 그런데 막상 파리에 가보니 분위기는 그게 아니었다. 입으로만 약소민족과 식민지를 위한 것이지 실제로는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을 위한 잔치였다. 실망한 그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도 소련의 실체를 보고 좌절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열강에 의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해방 이후에도 독자 노선을 걸었다.
“김규식이 볼 때 이승만이나 김구는 너무 오른쪽으로 치우쳐있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임시정부 때부터 좌익과는 연대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김규식은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려면 좌파와도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때 미국이 김규식을 지도자로 점찍었는데 실패한 원인은.
“당초 미국은 한반도에 중립적 국가를 설립하고자 했다. 그런데 소련이 해방 직후부터 김일성을 중심으로 38선 이북에 국가 설립을 진행하고 동유럽과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공산화 대응으로 방향을 잡았다. 좌우합작에 지지를 거두면서 김규식도 힘이 빠졌다. 여운형 피살도 영향을 미쳤다.”
 
지금 우리에게 김규식이 주는 메시지는.
“정치 양극화가 극심하다. 해방 직후처럼. 좌우합작을 추진한 우사의 정신은 국민통합과 사회통합, 남북평화 등을 생각하게 해준다. 김규식이 살았던 삼청장은 청와대 부지 안에 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 측에 삼청장 개방을 건의했는데 ‘안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남북평화 정책과 가장 잘 맞는 것이 우사의 정신이다. 대승적으로 결단해줬으면 좋겠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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