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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읽기] 사람이 그리웠던 한 해를 보내며

중앙일보 2020.12.30 00:25 종합 28면 지면보기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석양을 눈앞에 두고 있는 기분이다. 해를 넘기고 새해를 맞이하는 때이지만 크게 보면 해넘이와 해맞이로 달라질 것은 없다. 긴 인생의 여정에서 바라보면 지금은 수많은 언덕들 가운데 하나의 언덕을 넘어서려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삶의 행로를 뒤돌아보지 않을 수는 없다.
 

서로 안녕을 바랐던 올해 보내
뾰족한 생각을 못 감춰 아쉬워
등에 환한 빛 업고 새해 왔으면

한 언론사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바라보며 나는 올 한 해를 되돌아보았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벽을 사이에 두고 어느 양로원의 할머니와 시설 관리 책임자가 서로 포옹을 하는 사진이었다. 비록 플라스틱 벽이 있지만 손바닥을 펴서 마주 대고, 또 얼굴을 비비는 모습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늙은 할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는 것 같았고, 시설 관리 책임자는 괜찮다, 괜찮다고 조용히 말하는 것 같았다. 플라스틱 벽을 사이에 둔 이러한 상봉과 위로의 방식이 올 한해 우리 삶의 상징적 풍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해장국이 나오길 기다리며 신문을 뒤적이다/ 누군가의 소식을 읽고,/ 아― 이 사람 아직 살아 있었구나!/ 놀라고 다행스러워하는 마음이 된다// 허기가 힘을 내는 것이 우습다가/ 문득 또, 누군가 내 소식을 우연히 듣고/ 아― 그 사람 아직 살아 있었구나,/ 놀라길 바라는 실없는 마음이 돼본다”
 
이 시는 이영광 시인의 시 ‘겁’의 일부분이다. 올해는 정말이지 다른 사람의 무사하다는 안부, 그것이 가장 반가운 소식이었다. 만나지 못하더라도 잘 있다는, 안녕하다는 그 전갈이 오면 더는 바랄 일이 없을 정도였다. 주변의 지인들과 통화를 하거나 문자를 주고받으면 늘 그 끝자락엔 “아프지 말고”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올해는 유난히 사람이 그리웠던 해였다.
 
사적인 얘길 하자면, 어제 찍은 사진처럼 내게도 소중하고 마음이 산뜻해지고 인상적이었던 일화의 장면들이 있었다. 우선 감귤 상자가 생각난다. 제주에 살면서 훈훈하게 느낀 것은 음식점마다 감귤 상자를 놓아둔다는 사실이었다. 음식점들은 식사를 마친 후에 나가는 손님들을 위해 출입구 쪽에 감귤 상자를 놓아두었다. 물론 감귤 상자에는 둥글납작하고, 잘 익고 새콤달콤한 귤들이 담겨 있었다. 수량의 제한 없이 드시고 싶은 만큼 드시거나 갖고 가시라는 것이었다. 대개는 노지(露地), 즉 비닐하우스가 아닌 한데서 수확한 것들이었다. 나는 그 감귤 상자에서 참으로 후한 인심을 보았다. 귤이 비싸고 싸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넉넉한 마음이 참으로 좋았다.
 
소소한 행복도 있었다. 밭농사를 위해 호미와 낫과 예초기를 구매했다. 뽕잎과 은행잎, 감잎, 깻잎, 솔잎을 함께 덖어 만든다는 오경차와 화병의 생화, 향을 가까이 한 일도 의미가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거실에서 키워온 치자나무를 큰 화분에 옮겨 심은 일도 빙긋이 웃게 했다.
 
서산대사는 “눈 덮인 들길을 걸어갈 때 모름지기 발걸음을 어지럽게 하지 말라. 오늘 남긴 나의 발자국이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라고 읊었다. 한 해의 잘못을 돌아보는 일은 이익이 있다. 내가 앞서가고 다른 사람이 나를 뒤따라 오기도 하지만, 어제의 내가 앞서가고 내일의 내가 그 길을 뒤따라 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올해를 돌아보면 개인적으로 아쉽고 부족했던 점도 많았다. 진각국사의 시에 또 이런 가르침이 있다. “항상 마음은 뚜렷하게 하고 입은 침묵하라. 어리숙한 사람과 도반을 하면 반드시 깨칠 것이다. 송곳처럼 뾰족한 생각을 감추게 하는 스승이 사람을 다루는 진정한 명수 아니겠는가.” 하지 않았어야 하는 말을 끝까지 참지 못했다. 어떤 말들이 의중에 있었으나 지금 하지는 않겠다고 작심했지만 스스로 지켜내지 못했다. 그 말들은 대개 불화와 오해를 키울 뿐이어서 침묵하는 게 훨씬 나았다. “송곳처럼 뾰족한 생각”도 많았다. 날카롭고 불처럼 뜨거운 생각들에 휩싸였다. ‘듣는 귀’를 충분히 사용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맨 마지막 말까지 들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이영광 시인은 시 ‘1월 1일’에서 새해 첫날 아침의 심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새해가 왔다/ 1월 1일이 왔다/ 모든 날의 어미로 왔다/ 등에 해를 업고,/ 해 속에 삼백예순네 개 알을 품고 왔다/ 먼 곳을 걸었다고/ 몸을 풀고 싶다고/ 환하게 웃으며 왔다”라고 썼다. 어둠을 걷어내면서 해가 떠오르듯이 우리의 내면에 신선한, 신생의 빛이 가득하고, 그 빛이 얼굴에 번지고, 무엇보다 그리웠던 사람을 만나 지내온 얘기를 서로의 앞에 부려놓았으면 좋겠다. 그런 새해가 왔으면 한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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