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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중대재해 윗선 처벌한다며 장관·지자체장은 뺐다

중앙일보 2020.12.30 00:04 경제 1면 지면보기
고용노동부 등 정부가 지난 28일 국회에 제출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수정안이 논란의 불씨를 더 키우고 있다. 기업에 대해서는 최고경영자(CEO)와 오너까지 관리 책임을 물으면서, 장관·지자체장은 처벌 대상에서 슬그머니 뺐다.
 

정부, 중대재해처벌법 수정안 논란
재계 반발에도 오너·CEO 처벌 유지
“가장 만만한 게 기업 또 증명된 셈”
노동계도 “법안 누더기 됐다” 비판

29일 정부·재계 등에 따르면 정부는 수정안에서 산재 발생의 인과관계를 추정해 경영자를 처벌하는 조항을 삭제했다. 법무부가 인과관계 추정만으로 형사처벌까지 하는 것은 “형사법상 무죄 추정의 원칙에 반할 소지가 있다”는 의견을 내놨기 때문이다. 정부는 또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 한도를 기존 ‘5배 이상’에서 ‘5배 이하’로 고쳤다. 법 적용 유예 대상 사업장도 완화했다. 법 적용에 따른 경제적 파장을 줄이기 위한 조치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원안과 정부 수정안.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원안과 정부 수정안.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하지만 뜯어보면 기업 오너와 CEO에 대한 처벌 조항은 사실상 그대로 유지했다. 재계에서 반발했던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최소 2년 이상 징역형을 부과하고,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조항은 바뀌지 않았다. 대신 정부와 공무원의 책임은 줄이고 면책범위는 넓혔다. 정부는 중대재해 발생 시 책임을 묻는 경영책임자의 범위에서 중앙행정부처,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의 장(長)을 제외했다. 법안 명칭도 기존 ‘중대재해에 대한 기업 및 정부 책임자 처벌법안’에서 ‘정부 책임자’를 빼고 ‘중대재해 기업 및 경영책임자 등의 처벌에 관한 법률’로 바뀌었다. 익명을 요구한 10대 그룹 부사장은 “위헌 시비가 거론된 조항만 미세 조정했을 뿐 기업들이 우려하는 과도한 처벌 조항은 실제적으로 바뀐 게 없다”며 “결국 이 정부에서 가장 만만한 존재가 기업인 것이 또다시 증명된 셈”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법안의 원안 통과에 공을 들이는 정의당과 민주노총 등 노동계는 “법안이 누더기가 됐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 같은 논란이 불거진 근본적인 원인은 재해 발생에 대한 직접적 책임이 없더라도 ‘윗선’과 관련자를 형사처벌하면 산재를 줄일 수 있느냐에 대한 시각차에서 발생한다. 정의당과 민주노총 등은 책임자 처벌 강화는 기업이 필수 안전·보건 조치 의무 이행의 경각심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고 강조한다. 또 이 법안이 산재 발생 사업장의 경영자를 무조건 처벌하자는 법이 아니라는 논리를 편다. 사고 발생 5년 전부터 안전·보건조치 의무 위반 사실이 수사기관 등에 의해 3회 이상 확인됐을 때나, 사업주가 사건 은폐를 지시하는 등 산재의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을 때 경영자 책임을 묻도록 설계돼 있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민노총은 산재 사고 대부분이 종업원 50인 미만인 소규모 사업장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이들 사업장에도 즉각 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계도 일하다 목숨을 잃는 노동자가 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재계는 실무자 부주의, 설비 고장 등 경영 활동과 직접적 인과관계가 없는 재해까지 기업주에 법적 책임을 지우는 게 정당하냐고 항변한다. 이근우 가천대 법학과 교수는 최근 ‘산재예방 선진화를 위한 입법과제’ 토론회에서 “법률 제정 목적이 정당하다는 것만으로 그 수단이 정당화될 수 없다”며 “중대재해, 경영책임자 등의 개념이 광범위하고 위험방지 의무 범위도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국회·정부가 처벌 만능주의에서 벗어나 위험의 외주화 등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동원 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내 산업 현장에서 산재가 자주 발생하는 이유는 위험한 작업을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불공정 거래의 문제가 있다”며 “이 같은 거래 관행을 막는데 집중하지 않고, 기업주·공직자 처벌 강화 조치 위주로 접근하는 것은 원시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세종=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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