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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중앙일보 2020.12.29 00:36 종합 35면 지면보기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최근 서울 시내 모 대학 교수 한 분을 만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올 한 해 온라인 강의를 했다는 그는 1학기와 2학기가 완전히 달랐다고 말한다. 화상회의 프로그램인 줌(Zoom)을 도입했지만, 제대로 활용할 줄 몰라 우왕좌왕한 1학기 때는 학생도 불만, 교수도 불만이었다. 그러나 줌을 이용한 원격 강의에 적응한 2학기 때는 매우 만족스런 강의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수업의 질과 수준이 대면 강의 때보다 훨씬 높아졌다고 한다.
 

코로나 앞에 나약한 인간이지만
놀라운 적응력과 대응력 보여줘
K방역 성공했다고 자랑할 것도
백신 때문에 낙담할 것도 없어

일주일에 한 번 3시간 속강(續講)을 하는 그분의 경우 강의할 내용을 하루 전 온라인에 올려 학생들이 미리 볼 수 있도록 했다. 실제 강의를 할 때는 미리 배포한 강의 요지를 토대로 1시간 동안 설명을 했다. 대면 강의를 할 때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체계적으로 다룰 수 있기 때문에 강의의 밀도와 몰입도가 크게 올라갔다. 이어 2시간 동안 라이브로 질의응답을 진행했는데,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학생들의 참여도가 대면 강의 때보다 훨씬 높았다고 한다. 그는 “코로나 사태가 끝난 후에도 온라인과 오프라인 수업을 적절히 결합하면 아주 효율적인 강의가 될 것 같다”면서 “코로나가 교육 제도 변화의 기폭제가 될 것 같다”고 했다.
 
원격 강의로 전환하면서 학생들이 학교에 있을 필요가 없어지자 기숙사를 학기 대신 일주일 단위로 빌려주는 대학교도 생겼다. 학교뿐만 아니라 사설 학원들도 대응에 나섰다. 온라인 라이브 수업을 하면 강의실이란 공간적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인터넷만 연결되면 장소에 관계없이 어디서나 강의를 들을 수 있다. 서울 대치동 학원가 강의를 듣기 어려운 지방 학생들은 물론이고 외국에 사는 한국 학생들도 강의에 참여할 수 있다.
 
지난 1년 코로나에 시달리며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을 실감했다. 동시에 인간의 놀라운 적응력과 대응력도 확인했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대한항공은 여객기를 화물기로 개조해 올 2, 3분기 연속 흑자를 기록했다.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하는 기업들의 매출이 크게 늘면서 그 분야 일자리도 늘었다. 코로나 팬데믹에서 오히려 기회를 찾은 기업들도 있다. 재택근무를 하는 고소득 직장인이나 전문직 종사자들이 전 같았으면 여행이나 외식에 썼을 돈을 고급 음향기기나 가전제품, 사무용 가구를 구입하고, 집안을 꾸미는 데 쓰면서 관련 업종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코로나 사태가 진정된 다음에도 재택근무가 뉴노멀이 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굳이 복잡한 도시에 사는 대신 한적한 교외에서 널찍하게 살겠다는 사람도 늘고 있다. 뉴욕의 경우 맨해튼의 집값은 내려가고 교외 지역 집값이 오르는 현상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 교외 거주 재택근무자 자녀들을 위한 원격 교육 시장도 커질 것이다.
 
페스트가 창궐한 14세기 중엽 유럽은 전체 인구의 3분의 1인 2000만 명을 잃었다. 봉건 사회와 교회의 절대 권위는 페스트로 치명타를 입었다. 페스트의 대유행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됐다. 21세기의 코로나 팬데믹은 속도와 경제 논리에 매몰돼 환경과 후세를 생각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온 인류에게 문명의 새로운 길을 여는 게임 체인저가 될지 모른다.
 
치료제와 백신의 발명으로 감염병을 극복했다는 믿음은 인간의 오만으로 드러났다. 보통 10년 걸린다는 백신을 코로나19에 맞서 불과 10개월 만에 뚝딱 만들어 낸 인간의 지혜는 평가할 만하지만, 그것이 만병통치약일 수는 없다. 계속해서 변이나 변종 바이러스가 등장하고, 언제 어디서 또 무슨 바이러스가 생겨날지 알 수 없다.
 
페스트가 번졌을 때 유럽인들은 환자가 발생한 집 대문에 붉은 십자가를 그렸다. 사람들의 이동을 금지하고, 감염자는 격리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없다. 감염자의 동선을 공개하는 것은 붉은 십자가를 긋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감염자가 발생할 때마다 쫓아가 격리하고 틀어막는 방역 형태도 달라지지 않았다. 정부가 자랑하는 K방역의 근간도 두더지 잡기 식 방역이다.
 
봉쇄조치(lock down) 없이 코로나 확산을 막았다는 K방역의 핵심 성과를 훼손하지 않으려고 문재인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 최고 단계 격상을 주저하고 있다. 성공 신화에 스스로 발목이 잡혀 추가 확산을 방치하는 꼴이 될 수 있다. 백신을 확보한 나라들이 집단면역을 통해 코로나의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갈 때 우리는 여전히 터널에 갇혀 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백신에서 치명적 부작용이 발생한다면 되레 우리에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누가 진짜 잘했는지는 끝까지 가 봐야 안다.
 
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K방역을 자랑할 것도 없고, 아직 백신을 못 구했다고 마냥 낙담할 일도 아니다. 우리만 끝났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모든 나라가 코로나에서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끝난다. 조바심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겸허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2021년 코로나 시즌2를 준비하자.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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