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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박원순 피해자의 편지 3통…'SNS 단두대'에 올린 그들

중앙일보 2020.12.25 05:00 종합 12면 지면보기
지난 23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공간이 시끌시끌했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재임 시절 비서실에 근무했던 민경국 전 인사기획비서관, 오성규 전 비서실장 등이 페이스북에 성추행 사건 피해자 A씨가 쓴 자필편지를 연이어 공개하면서다. ‘A씨가 성추행 피해를 호소한 기간 박 전 시장에게 호의를 담아 자필편지를 쓴 만큼 A씨를 위력에 의한 성추행 피해자로 보기 어렵다’는 게 이들 주장의 핵심이다.
 

박원순 측 잇따라 피해자 편지 공개
“호의 담아 자필로 썼다” 2차 가해
피해자 측 “조직 내 소통방식일 뿐”

“성추행한 사람에게 어떻게 편지를”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사건 피해자가 2016년 2월 박 전 시장의 생일을 맞아 쓴 편지. [민경국 전 인사기획비서관 페이스북 캡처]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사건 피해자가 2016년 2월 박 전 시장의 생일을 맞아 쓴 편지. [민경국 전 인사기획비서관 페이스북 캡처]

공개된 편지는 총 3통이다. 2016년과 2017년엔 박 전 시장의 생일을 맞아 축하편지를 썼고, 2018년엔 해외 순방을 떠나기 전 아쉬움 등을 담아 썼다. 내용은 박 전 시장에 대한 감사와 존경, 생일축하 메시지가 대부분이다. “바쁜 일정 중에도 한번이라도 더 웃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드린다” 등 문장이 포함돼 있다.
 
민 전 비서관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편지 내용은 단순히 박 전 시장의 생일 때 직원들이 쓰는 ‘롤링페이퍼’ 수준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김민웅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역시 편지 내용을 SNS에 공개하며 “어떻게 읽히십니까. 4년간 지속적인 성추행 괴롭힘을 당해왔다고 주장한 여성이 쓴 편지”라며 “2019년 9월엔 자기 동생 결혼기념 글까지 부탁한다. 성추행한 사람에게 그런 걸 부탁할 수도 있는 모양”이라고 했다.
 

“성추행 없었다면 정황말고 입증하라”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전 비서실 직원들의 편지 공개는 '피해자 착취'이며 성추행이 없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부소장 페이스북 캡처]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전 비서실 직원들의 편지 공개는 '피해자 착취'이며 성추행이 없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부소장 페이스북 캡처]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조직 내 위계 관계에서 비롯된 소통 방식의 하나일 뿐 위력에 의한 성추행이 있었는지를 밝히는 직접적 증거와는 무관하다는 게 A씨 측 항변이다. A씨의 지원 단체인 한국성폭력상담소 김혜정 부소장은 “(박 전 시장에 대한) 심기 보좌도 없었고, 성추행도 없었고, ‘아무도 안 쓰는 시장 생일 카드를 피해자 혼자 써서 애초부터 의아했다’고 (전 비서관들이) 스스로 입증하라”고 말했다. A씨가 쓴 편지는 박 전 시장 생일 때 직원들이 하는 연례행사 중 일부인 만큼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A씨의 법정 대리인인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변호사는 통화에서 “성추행 피해자는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즉 ‘피해자다움’ 강요”라고 규정했다. 그는 “다른 직원들도 편지를 써서 전달하는데 ‘성추행 피해자 중에는 편지를 쓸 수 없다’는 법 조항이라도 있느냐”며 “비서실 직원인 A씨가 ‘(조직 수장인) 박원순을 싫어한다’고 과연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편지 공개는) 피해자의 정신적 고통을 이용해 좌절시키려는 의도”라고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A씨의 실명이 노출되면서 논란이 커지기도 했다. A씨 측은 “김민웅 교수가 처음 편지 사진을 공개할 당시 피해자의 실명이 그대로 적혀 있는 사진을 노출했고, 캡처본도 갖고 있다”며 “얼마 전 A씨 실명을 네이버 밴드, 블로그에 공개한 이들을 고소한 사실을 알면서도 이 같은 행동을 한 건 고의를 넘어 악의적”이라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찰나의 노출 현장은 제 페이스북”이라고 시인했지만 “당사자는 실명 노출 문제라는 커튼 뒤에 존재를 감추고 있다. 생일이 아닌 날에 보낸 편지는 뭐라 할 건가”라고 의혹을 물리지 않았다.
 

“피해자 평소 태도, 성추행 여부와 무관”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으로 고소한 피해자의 법률 대리인을 맡고 있는 김재련 변호사가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지방경찰청 앞에서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과 2차 가해자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뉴스1]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으로 고소한 피해자의 법률 대리인을 맡고 있는 김재련 변호사가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지방경찰청 앞에서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과 2차 가해자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뉴스1]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논란은 더이상 새로운 얘기가 못될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돼 왔다. 친여(親與) 성향 유튜브 채널 중 일부는 박 전 시장의 생일파티 영상 등을 공개하며 A씨가 박 전 시장과 가까이 붙어있다는 점을 문제삼았고, 김주명 전 비서실장 등은 국가인권위에 제출한 의견서를 공개하며 A씨가 승진 후에야 비서실을 나간 점, 박 전 시장의 해외순방 수행에 대해 부러움을 표시한 점 등을 문제삼았다.
 
하지만 피해자의 평소 태도를 유추해 성추행 여부와 직접 결부시켜 해석하는 건 오류 가능성이 크다는 게 관련 전문가들의 얘기다. 과거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 김지은씨 변호를 맡은 서혜진 변호사는 “성폭력 피해자가 사건 이후에도 정상적으로 근무하거나 친근한 문자를 보낸 일 등을 이유로 피해자를 2차 공격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며 “그러나 피해자의 평소 행동과 상관없이 가해자가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는 수없이 많다”고 말했다.
 
오 전 비서실장 역시 이달 초 “사실의 인정은 증거에 의해야 한다는 증거재판주의를 일방적으로 무력화하는 건 위험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에 근거하면 성폭력 유무를 직접 증명하지 못하는 주변 정황을 부각하는 것 역시 증거재판주의에 반하는 셈 아닌가.
 
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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