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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연의 시시각각] 금선탈각

중앙일보 2020.12.25 00:34 종합 30면 지면보기
최상연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전철로 출퇴근하는데 매일 초등학생이 된 느낌이다. 이런 건 하고 저런 건 하지 말라는 잔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코로나 이후 심해졌지만 방역과 관계없는 생활지도가 더 많다. 회사에 도착하면 장애인 인식 개선이다 뭐다 해서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5대 교육이 기다린다. 법으로 정해져 있어 안 받으면 과태료를 낸다. ‘쥐 죽은 듯 집에 머물라’는 시청 지시도 받았다. 쥐 죽은 듯 조용한 식당과 매장에 가도 이런저런 주문이 폭포수다. 가뜩이나 장사도 안되는 마당에 갑질하려는 건 아닐 것이다. 정부가 시키니까 그럴 텐데 듣고 있자면 좀 그렇다.
 

민주화 후 가장 강력한 권력 장악
위헌 논란의 완력 입법으로 휘둘러
절차 정당성, 공정성이 우선이다

그래도 이 정도까진 ‘무식한 백성’으로서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나라와 국민 사이엔 서로가 넘으면 곤란한 선이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뛰면 건강에 좋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모든 국민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뛰어야 한다’는 법을 만드는 나라는 없다. 그런데 지금 정권은 그러고 있다. 차마 못 하는 게 없고, 절대로 안 하는 것도 없다. 공수처법 개정안으로 시작한 거여의 완력 입법이 ‘대북 전단 금지법’까지 400개 법안으로 나왔다. ‘윤석열 출마 방지법’도 대기 중이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기막힌 발상이다. ‘그런 법이 어딨어?’란 말 그대로다.
 
위헌 논란이 끊이질 않고, 실제로 위헌 소송도 곧 이어질 태세인데 중요한 건 야당과 여론 반대는 안중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반대 목소리는 코로나를 들어 강제로 틀어막았다.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 대통령 말 한마디에 법이건 정책이건 뚝딱 나오는 ‘인치 공화국’이기 때문이다. 무늬만 삼권분립이다. ‘임대료 멈춤법’이든 뭐든 늘 선의는 앞세운다. 하지만 닥치고 공격이 국민 갈등과 국론 대분열을 만들고, 키우고, 나라가 멍든다. 윤석열 검찰총장 징계가 그렇고, 야당 눈치조차 볼 필요가 없게 만든 공수처법 개악도 뿌리가 같다.
 
이런 법들을 당장 시행하지 않는다고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툭하면 코로나 위기를 들먹이는데 진짜로 위기감은 있는지 궁금하다. ‘무식한 기업’ 혼내주려는 반기업법이 쓰나미다. 국회엔 ‘한 달 일해도 퇴직금을 주라’는 등의 규제 법안이 500개를 넘는다. 일자리가 도대체 어디서 생기겠나. 정책 방향을 잘못 잡은 게 문제의 근원인데 실패를 인정하고 돌아가는 경우는 없다. 돈 풀어 메꾼다. 지난 3년이 줄곧 그랬다. 내년엔 선거도 있다. 코로나 대응을 앞세워 역대급 포퓰리즘으로 달릴 게 뻔하다. 그러니 다들 ‘나라가 세월호’라고 불안해한다.
 
역주행도 문제지만 최소한 민주적 절차는 지켜 달라는 게 민심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 시절 열흘 가까운 필리버스터 끝에 ‘혼신의 힘을 다한 노력이 감동과 희망을 줬다’고 자찬했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가장 강력한 권력을 장악한 정부는 ‘절차적 정당성과 공정성’을 허무는 데 그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중이다. ‘제 맘대로 법’ 만들고 기회만 있으면 빚을 내 제 돈인 양 뿌려대며 윤미향·추미애 사태, 부동산 대란의 위기를 맞으면 편가르기에 남 탓이다. 경복궁이 무너지면 대원군의 부실공사 탓으로 돌릴 거란 우스개가 나왔다.
 
금선탈각(金蟬脫殼)은 매미가 허물을 벗는다는 뜻이다. 유방이 항우군에게 포위됐을 때 부하가 유방으로 변장하고 대신 잡혔다. 그 틈에 도망갈 수 있었다. 버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매미처럼 자신의 허물을 과감하게 벗어던지는 게 날아오를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문 대통령은 과거 ‘싸가지 없는 진보’를 말한 적이 있다. ‘이념·정책·주장 때문이 아니라 태도 때문에 사람들이 거리를 둔다’는 취지였다. 맞는 말이다. 코로나 들이대며 ‘내 맘대로 법’ 폭탄을 안길 때가 아니다. 폐법 경쟁에 나설 때다. 설득하고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게 나랏일이다. 싸가지 회복의 길이다.
 
최상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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