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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의 철학이 삶을 묻다] 불안의 길목에서 만나는 실존적 자아, 그리고 절대자

중앙일보 2020.12.25 00:15 종합 23면 지면보기

실존철학의 아버지 쇠렌 키르케고르

22일 코로나19로 폐쇄된 이탈리아 오르비에토의 유적지 포조 델라 카바 에 마스크와 백신을 가져온 동방박사의 조각상이 전시된 모습. 키르케고르는 ‘영원한 진리와 만나는 것 자체가 이성 너머에 있으며, 신앙을 선택하여야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EPA=연합뉴스]

22일 코로나19로 폐쇄된 이탈리아 오르비에토의 유적지 포조 델라 카바 에 마스크와 백신을 가져온 동방박사의 조각상이 전시된 모습. 키르케고르는 ‘영원한 진리와 만나는 것 자체가 이성 너머에 있으며, 신앙을 선택하여야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EPA=연합뉴스]

중국 우한에서 전염병에 대한 소식이 전해진 지 일 년이 지났다. 그때는 무게를 가늠하기 쉽지 않았고 크리스마스도 예년과 같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를 전하는 은은한 캐럴, 트리 밑에서 가족들과 함께 하는 오붓한 시간을 떠올리며 불길한 마음을 억누를 수 있었다.
 

팬데믹으로 부각되는 실존의 영역
실존적 불안 넘어 영원과 만나려면
낮은 곳 향한 사랑에 무릎 꿇어야
성탄절 맞아 기독교인들 되새기길

올해 인류는 진화의 가장 초보적 단계의 바이러스 앞에 무릎을 꿇는 경험을 하였다. 지능도 없이 번식하는 미생물의 위세에 1년 새 170만명의 생명이 희생되었고, 유일한 희망인 과학도 지난 1년간 별 도움이 안 되어 거리두기라는 원시적 처방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AI와 생명과학의 도움으로 신의 영역인 영생에 인간이 도전하여 현실화될 것처럼 떠들던 한 호사가의 이야기가 공허하게 들린다.
 
세상을 호령하던 인간의 기세가 꺾이는 좌절과 겸손의 시간은 왜소함에 대한 자각을 초대한다. 초월적 영역에 대한 동경을 자극하며 절대자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예측 가능하고 정형화된 세계상의 귀퉁이가 허물어져 가면서 다가오는 왜소함과 불안은 일시적인 느낌일까? 아니면 세상의 흐름에 몸을 실어 애써 외면하던 인간의 근본적 모습이 멈춤의 시간에 고개를 들어 우리와 마주 서고 있기 때문일까?
  
두려움과 떨림
 
키르케고르의 초상화. [사진 위키피디아]

키르케고르의 초상화. [사진 위키피디아]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는 과학이 인간을 행복한 미래로 인도할 것이라는 낙관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시대에 태어났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이성적 그림으로 포착되지 않는 영역을 삶이라는 무대의 주연으로 등장시킨다. 삶은 구체적 상황 속에서의 나의 존재와 관련된 질문들로 어우러져 있다. 이 질문들은 나만이 가늠할 수 있는 무게로 다가와, 내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는 이성적 논리적 분석은 공허하게 들린다.
 
문득 멈추어 나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으며 그 방향이 어떤 의미인가를 물어보라. 예기치 못하게 부딪친 어려움 앞에서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물었을 때를 기억해보라. 자연의 이치에 대한 과학적 지식,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인지에 대한 통속의 지혜와 관습은 이들 질문 앞에 무력하고 그저 생소하다.
 
키르케고르는 세계에 홀로 서서 마주하는 “두려움과 떨림”을 인간의 기본 조건으로 제시한다. “모든 인간은 두려움과 떨림 속에 살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두려움과 떨림에서 면제되는 어떠한 확립된 질서도 없다.” 통속의 관습과 윤리가 힘을 잃는 내면의 깊은 곳에서 만나는 공허함, 두려움, 불안은 강력하나 정체가 분명치 않다. 어느 대상을 향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저 두려움.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아니라 그저 불안함. 사회적 관습에 매몰되고, 개인적 탐닉에 몸을 맡겨 한순간 망각할 수는 있으나 벗어날 수는 없는 삶의 조건이다.
  
이성에 대한 도전
 
키르케고르는 이성적 지식은 삶에 진정으로 중요한 진리를 깨닫는데 오히려 방해된다고 생각하였다. 진정한 문제는 나의 상황과 엮이어 나의 어깨에 고스란히 놓여있는, 태생적으로 주관적인 실존의 문제다. 과학적 철학적 지식은 쌓이면 쌓일수록, 세계란 어떤 것이고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빛바랜 정형화되고 일반화된 그림만 그려질 뿐, 구체적이고 주관적인 나의 삶의 영역은 생기를 잃고 가려진다. 삶과 진정성 있게 마주하려면, 지식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면서 실존의 영역으로 다가가야 한다.
 
이성과 논리로 무장된 보편적 지식이 인간의 주체성이 머무는 실존적 영역으로부터 인간을 떼어놓는다고 생각한 키르케고르는 과학이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구원으로 가는 길에 놓인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헤겔도 같은 이유에서 맹렬히 비판한다. 이성의 움직임을 통하여 변증법적으로 완성의 단계에 도달하는 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새로운 바벨탑을 건축하는 오만한 시도라고.
 
이성에 등 돌린 키르케고르는 논리적 논증에 호소하지 않고, 아이러니, 역설, 풍자 등과 같은 비전통적 화법을 구사한다. 익명을 사용하여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며, 한 저술을 부분으로 나누어 저자를 다른 이름으로 표시하기도 하고, 같은 날 몇 개의 저술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출판하기도 한다. 본명을 사용할 때도 저자가 아니라, 편집자인 양 표기한다. 저자로서 일정한 관점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논리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각 독자가 자신의 실존적 문제에 열정을 가지고 스스로 마주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절대자로의 도약
 
이성에 의하여 가려진 삶의 안개를 거둬내고 실존의 영역으로 들어서면, 인간은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절대자와 일대일로 만난다. 그는 기독교를 이성적으로 변론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부조리함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신앙으로 도약한다. 무한하고 광대한 신이 유한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부조리하다. 아브라함에게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는 것, 그에 따르려 하는 것 모두 부조리하다. 신의 뜻을 따라 성실하게 살았던 욥이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하는 것, 그러다가 복을 되돌려 받는 것도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근본은 어차피 이성 너머에 있는 것이므로, 이성보다 더 높이 있는 진정한 진리에 도달하려면 이성을 유보하여야 한다. 영원한 진리와 만나는 것 자체가 이성 너머에 있으며, 신앙을 선택하여야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 부조리하기에 믿는 것이 신앙이다. 이성에 대한 집착을 풀어놓은 키르케고르가 이성 너머의 부조리 영역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여기서 다시 절대자에게로 우리를 안내한다.
  
성탄일에
 
키르케고르는 기독교 정신을 되살리는 것을 자신의 철학적 소명으로 삼은 기독교 철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기성의 기독교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기독정신과 기독교 제도를 구분하고, 진정한 신앙은 교회의 도그마를 되새김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 상황에서의 선택을 통하여 영원성과 만나는 것에서 성취된다고 하였다.
 
또한 신앙은 반복적 승인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새로워져야 한다. 감각적 경험에 함몰되는 이기적인 심미적 단계를 넘고, 공동체의 관습과 규범에 합당한 의무를 수행하는 단순한 윤리적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욕망과 관습을 넘어 자신으로 돌아올 때 직면하는 불안의 위험한 파도를 넘으며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의 정신을 되새기며, 영적인 정체성을 위하여 자신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실존적 불안의 상황을 초월하여 영원과 만나려면, 개인의 이익이나 정파적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낮은 곳을 향한 헌신을 위하여, 사랑을 위하여 무릎을 꿇어야 한다. 예수 탄생한 날 기독교인들이 되새겨야 할 도전이다.
 
키르케고르는 기독교 철학자였으나, 그의 영향은 종교철학에 머물지 않는다. 정서로 채색된 삶의 영역인 불안(Angst)을 주제화하여 철학적 논의를 확대한 것은 현대철학의 여러 조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떤 이들은 실존철학의 형성에 미친 영향에 주목하며, 키르케고르를 실존철학의 아버지라 부르기도 한다. 이성과 과학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오늘의 관점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객관화된 세계에서 잃을 수 있는 삶의 내면성, 진정성, 주체성, 단일성을 부각시킨 기여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을 넘어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절대자에 의존하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질문은 종교를 초월한다. 그의 조언을 따라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는 최소한 다음의 질문에 답하여야 한다. 당신은 실존의 불안한 상황을 피하기 위하여 세파에 몸을 싣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잊기로 하였는가? 아니면 불안을 온몸으로 마주하며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는 선택과 결단을 할 것인가?  
 
김기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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