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더오래]암 투병 남편과 마지막 기차여행 떠난 어느 봄날

중앙일보 2020.12.23 07:00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71) 

며칠 전 90년의 역사를 가진 안동역이 내가 사는 인근으로 새 역사를 지어 이전했다. [사진 송미옥]

며칠 전 90년의 역사를 가진 안동역이 내가 사는 인근으로 새 역사를 지어 이전했다. [사진 송미옥]

 
멀리서 반짝이는 물체 하나 길게 이어지더니 동굴 속으로 사라진다. 기차가 지나가는 거다. 마당에서 바라보는 기차는 낭만열차다. 며칠 전 90년의 역사를 가진 안동역이 내가 사는 인근으로 새 역사를 지어 이전했다. 서너 시간 걸리던 한양길이 내년부터는 두 시간도 채 안 걸린다는 차세대 고속열차로 바뀐다. 대도시야 이미 KTX의 출현으로 반나절 생활권이지만 이제는 지방 도시까지 최첨단 세상이 되었다. TV 방송에선 고택 마당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마지막 열차를 떠나보내며 독립운동의 성지인 ‘임청각’ 복원사업을 축하하는 행사를 벌였다.
 
자가용이 없던 시절 기차와 함께 살아가던 우리네 삶의 이야기, 인생 이야기도 나이만큼 길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를 따라 기차를 처음 타던 날, 길게 이어진 객차를 바라보며 가슴이 쿵쿵거리던 날, 남편을 만나 경산역에서 대구역까지 기차를 타고 데이트하던 시절, 신혼 초 하던 일이 다 무너지고 먼저 도망간 남편 찾아 태백으로 가던 날 이웃집 경운기로 싣고 나온 이불 보따리와 간장 단지를 묶어 화물열차에 실려 보낸 눈물의 이삿짐…. 지나고 나니 모두 새로운 시간이다. 그 밑바닥 시간이 없었으면 지금이 이토록 아름다울까.
 
오늘은 남편과 함께한 마지막 열차 여행을 꺼내본다. 남편은 간암, 위암 선고를 받았지만 연명을 위한 수술이나 어떤 병원 치료도 거부했다. 사는 날까지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다가 죽겠다는 굳은 의지를 아무도 이기지 못했다. 그리하여 죽는 날까지 움직였으니 겉모습은 좋았다.
 
자가용이 없던 시절 기차와 함께 살아가던 우리네 삶의 이야기, 인생 이야기도 나이만큼 길다. [사진 송미옥]

자가용이 없던 시절 기차와 함께 살아가던 우리네 삶의 이야기, 인생 이야기도 나이만큼 길다. [사진 송미옥]

 
선고를 받고 무작정 시골에 내려온 남편을 따라 나도 많은 경험을 했다. 이번 해가 마지막이려니 하는 마음으로 10년을 더 살았다. 남편이 떠난 해인 2014년, 1월 한 달은 설악산을 돌았다. 기차를 타고 강릉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목적지까지 놀며 쉬며 이틀이 걸렸다. 남편의 보호자랍시고 따라다녔는데 걷기 싫어하는 내가 도리어 보호받으며 다녔으니 지금 생각해도 꿈같다.
 
같은 해 5월의 어느 봄날, 늘 그랬듯이 마지막 여행이라며 우리는 또 기차를 탔다. 그때는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막연한 슬픔이 밀려왔다. 그러나 겉으론 가벼운 마음으로 서울로 올라가 다시 목포행 열차를 타고 전라도를 순회하고 여수, 거제, 부산을 쉬엄쉬엄 돌아 올라왔다. 가는 곳마다 유명한 절과 성당이 보이면 무작정 들어가서 욕심을 바라는 간절한 기도를 했다. 지금도 내가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편과의 기차여행이다. TV를 보다가도 남편이 ‘저곳에 가 보고 싶다’ 하면 ‘가자’ 하고 일어섰다. 그는 10월에 떠났다.
 
 
남편이 떠나고 난 후, 혼자서 살아야 했던 무섭고 두려운 산속 생활이 두 달 만에 끝났다. 깊은 산속 독가촌이던 집이 얼떨결에 팔리고 집주인이 사정이 있다며 한 달 안에 집을 비워주길 부탁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과정은 마지막까지 동행해줘 고맙다며 하늘에서 보낸 남편의 배려 같았다. 이웃 어르신 모두 산속 생활을 접고 떠나는 나를 시원섭섭해 했다.
 
안동 작은 아파트로 이사 와 처음 한 일은 기차여행이다. 우울한 마음을 정리하려고 결단한 행동은 남편과 함께 돌았던 여행길을 거꾸로 기억하며 다시 정리하는 거였다. 곳곳마다 느리게 가는 우체통에 마음을 정리하는 편지를 써서 보낸 기억이 새롭다. 돌아오니 슬픔은 서서히 사라지고 새로운 날이 보이기 시작했다.
 
새로 생긴 새 안동 역사의 주변은 아직은 황량하다. 그러나 쏠쏠하게 찾아보면 주위로 세계문화유산인 봉정사, 하회마을, 가일마을, 소산마을 등 역사가 있는 고택이 많다. [사진 송미옥]

새로 생긴 새 안동 역사의 주변은 아직은 황량하다. 그러나 쏠쏠하게 찾아보면 주위로 세계문화유산인 봉정사, 하회마을, 가일마을, 소산마을 등 역사가 있는 고택이 많다. [사진 송미옥]

 
우리 나이는 예전엔 늙은이였지만 지금은 가장 활력이 넘치는 나이다. 그만큼 각중에 큰 병이 적군처럼 쳐들어오기도 한다. 몸과 마음이 무거워지고 무기력해지기 전에 혼자서 때론 여럿이서 걸으면서 할 수 있는 좋은 여행이 기차여행이다. 요즘 기차여행은 옛날과는 많이 다르다. 침대와 각종 편의시설이 구비되어있는 여행전용 기차도 있고 일반 기차라도 느낌이 다르다. 이 글을 쓰다 보니 기차 안에서 씻고 먹고 자며 여행했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생각난다. 홀로 여행은 힘들어도 지나고 나면 다 재밌다.
 
새로 생긴 새 안동 역사의 주변은 아직은 황량하다. 그러나 쏠쏠하게 찾아보면 주위로 세계문화유산인 봉정사, 하회마을, 가일마을, 소산마을 등 역사가 있는 고택이 많다. 내가 사는 이 마을도 멀리서 오는 여행객이 지나가며 즐길 수 있게 낙동강 강변 따라 코스모스길, 유채길을 만들어 가꾸고 있다. 그나저나 홀로 여행이라도 코로나가 죽어야 기차표를 한장 끊어 보겠는데 지금은 이대로 연말연시를 맞이할 것 같다. 저 멀리서 빛 한줄기가 또 동굴 속으로 사라진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공유하기
송미옥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필진

[송미옥의 살다보면] 요양보호사 일을 하다 평범한 할머니로 지낸다. 지식은 책이나 그것을 갖춘 이에게서 배우는 것이지만, 인생살이 지혜를 배우는 건 누구든 상관없다는 지론을 편다. 경험에서 터득한 인생을 함께 나누고자 가슴 가득한 사랑·한·기쁨·즐거움·슬픔의 감정을 풀어내는 이야기를 쓴다. 과거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이웃과 함께 남은 인생을 멋지게 꾸며 살아보고자 한다.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