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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일 없나요” 극단선택 시도자에게 새 삶 준 한마디

중앙일보 2020.12.22 00:02 종합 14면 지면보기
전북의 80대 남성은 오랫동안 가족 갈등을 겪어왔다. 그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판단해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다행히 이웃에게 발견돼 응급실에 실려가 목숨을 건졌다. 응급실에서 자살시도자 사례관리사를 만났다. 처음에는 낯설어 관리사를 거부했으나 설득 끝에 마음의 문을 열었다. 이 남성은 관리사에게 가슴에 쌓인 얘기를 쏟아냈다. 그리고 웃으며 퇴원했다. 관리사는 손 편지와 전화상담, 문자로 이 남성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는 “살면서 이렇게 누군가의 관심을 받아본 것이 처음”이라며 글씨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왜 그런 몸쓸 짓을 했는지…”라며 새로운 삶의 의지를 표현하게 되었다고 한다.
 

생명 그 소중함을 위하여 (40)
손편지·전화상담 등 안부 묻자
“내가 왜 그런 몹쓸 시도했는지…”
전문가 “작은 공감과 관심 중요
함께 원인 찾아 극복할 수 있어”

70대 A씨도 3년 전 극단선택을 시도했다가 극적으로 구조됐다. 지나가던 행인이 발견하면서 다행히 목숨을 구했지만 의식을 찾자마자 A씨가 한 말은 “나를 왜 살렸느냐” 였다. 가족과 연락이 끊긴 채 홀로 고시원에서 살고 있었는데 허리가 아파 일을 못하게 되면서 우울증이 찾아왔고 방세를 내야 하는 날 결국 자살을 결심했다. 그랬던 A씨가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바꾼 건 병원과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 등에서 A씨를 돕고자 발벗고 나서는 걸 보면서다. 한 재단을 통해 치료비와 생계비 일부를 지원받아 허리와 목을 치료했고, 구청이 낮은 임대료로 머물 곳을 마련해줬다. 우울증이 차츰 나아졌고, 허리와 목이 괜찮아지면서 일자리를 구했다. 삶의 희망을 찾게 됐다.
  
"도와줄 서비스 있는데 포기하기도"
 
전문가들은 작은 공감과 관심이 극단 선택을 예방할 첫 단추라고 입을 모은다. 백종우 중앙자살예방센터장(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은 “도움 받을 수 있는 의료서비스나 사회복지서비스가 분명히 있는데도 절망 때문에 포기해서 아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경우가 적지 않다”며 “여러 사람이 같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할 방법을 찾아가다 보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희망이 생기게 되고 희망을 통해 살아야 할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위험 노출돼도 도움 요청 적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위험 노출돼도 도움 요청 적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자살 고위험군을 관리하는 심보미 천안시자살예방센터 사회복지사도 “10~80대까지 자살 시도자를 많이 만나는데 본인의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가 없어 극단선택을 시도하는 분이 많다”며 “얘기를 듣고 힘든 원인을 찾아 같이 극복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자살 유가족도 관심과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다. 7년 전 B(49)씨의 16세 아들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자식 앞세워 보낸 엄마’ 같은 반응이 두려워 주변에 아들의 죽음을 말하지 못했고, 위로 받지도 못했다. B씨는 “아들을 따라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며 “내가 가해자인마냥 죽을 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털어놨다. 갑상선 질환에 스트레스성 난청, 허리 디스크, 일시적 실명 증상까지 B씨를 괴롭혔다. B씨는 지난 9월 우연히 지역 자살예방센터의 ‘자살 유가족 자조 모임’에 나가게 됐다. 여기서 아들 이름을 크게 부르며 마음껏 울었고 아들을 애도했다. B씨는 “유가족 자조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세상이 무서웠을 것”이라며 “아들의 죽음을 편하게 얘기하기 시작하면서 약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건강이 회복됐다. 힘내지 않아도,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말 한마디에 큰 위로를 받았다”고 말했다.
 
권윤현 천안시자살예방센터 사회복지사는 “유가족 대부분이 슬픔을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묵혔던 감정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그간 짓눌렀던 중압감에서 벗어난다”며 “누가 날 챙겨주거나 걱정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동기 부여가 되는 사례를 많이 봤다”고 말했다. 자살예방법 3조에는 자살 위험에 노출된 사람은 국가와 지자체에 구조를 요청할 권리가 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이런 권리는 잘 실현되지 않는다.
  
극단선택 생각한 사람 17%만 상담받아
 
2019년 자살예방백서에 따르면 2016년 극단 선택을 생각했던 41만6954명 중 1년간 정신 문제 관련 상담을 받은 경우는 17%에 불과했다. 법에 적시된 권리가 잘 실현되지 않았다. 정부와 지자체가 극단선택 예방 정책 중 하나로 도움 청할 권리를 중요하게 홍보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자살 유족 대다수, 주변에 사망 사실 숨겨.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자살 유족 대다수, 주변에 사망 사실 숨겨.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보건복지부는 지난 9월 “힘들다면 침묵하지 말고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공익광고를 한 달간 내보냈다. 서일환 복지부 자살예방정책과장은 “올해 코로나19로 힘들어진 이들이 많아진 만큼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라는 메시지를 홍보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양두석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안실련) 자살예방센터장(가천대 교수)은 “누구나 살면서 위기가 오는 만큼 한 번씩 겪을 수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해야 한다”며 “정부에, 지자체에 손 내밀면 찾을 길이 있다”고 강조했다.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는데 그럴 때 누군가가 관심을 갖고 대화해주면 생각을 돌릴 수 있는 사례를 많이 봐왔다”며 “어려울 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게끔 전문가에게 연결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
 
중앙일보·안실련·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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