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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K-구재는 어디에?

중앙일보 2020.12.21 00:55 종합 31면 지면보기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나는 이즘 확신한다. 더 무서운 현실이 대기 중임을. 일 년이면 끝날 거라는 낙관적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현대과학은 무력했다. 나노 몸통에 돌기를 두른 코로나 바이러스는 과학의 담장을 마음껏 뛰어넘었고, 초연결 문명의 급소를 공격했다. 일 년을 빼앗겨 지칠 대로 지친 세모(歲暮)에 다시 빼앗길 일 년을 예약해야 하는 시대의 운명은 처참하다. 내년 3월이면 세계 확진자 1억 명, 사망자 2백만 명에 근접한다. 1919년 스페인독감 이후 세계가 뽐낸 과학은 확진자 규모를 5분의1밖에 줄이지 못했다. 인류는 저주를 받았다.
 

빼앗긴 일 년에 빼앗길 일 년 예약
국민의 절반이 스러진 무덤에 꽂는
정의의 깃발이 무슨 소용 있으랴
국가적 재난 ‘K-구재’로 전환해야

홀로 휴대폰을 보는 횟수가 확실히 늘었다. 만남의 갈망, 접촉해야 할 생존방식, 함께 하는 동행의 습관을 만족시킬 대체물은 마땅치 않다. 인파가 넘쳤던 지난 시대의 세모는 풍요했다. 지금, 철시한 겨울밤의 도시는 적막하다. 크리스마스캐럴도 구세군 종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말라리아에 습격당한 밀림 속 원시부족처럼 웅크렸던 긴 세월을 묻고 활기찬 시간을 예약해야 할 이 때 인류사회의 진로를 밝혀줄 신호등은 보이지 않는다. 고통의 연속이었다. 문명의 문법이 무너졌음을, 이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지난 일 년 간 속절없이 망가진 일상과 생계토양의 황무지화(化)를 각오해야 할 이 시점에 향수(鄕愁)는 사치다. 망가진 일상이 정상, 그것에 적응해야 한다.
 
등하교, 출퇴근 같은 단어는 2020년 타임캡슐에 묻혔다. 올해 입학생은 담임선생의 다정한 얼굴, 벗이나 친구, 캠퍼스 낭만을 아예 포기했다. 얼떨결에 진급하는 신입생은 저주받은 현실의 선두주자다. 신입사원도 팀워크를 발휘할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정보네크워크로 연결된 가상공간에서 ‘그들’과의 가상연대를 확인할 뿐이다. 미국 하버드대학은 2021년 교육계획에서 ‘비대면 강의 50%’를 제안했는데 낙관적 발상이다. 캠퍼스와 교실이 없는 신개념의 학교, 교사와 교수가 분산된 채로 강의가 이뤄지는 네트워크학교가 이른바 위급한 시대의 뉴노멀이다. 지덕체(智德體)는 알아서 할 일, 보육원부터 대학까지 돌봄과 교육방식이 요동치고 있다. 대면, 접촉 방식은 끝났다.
 
취업시장은 이미 쑥대밭이다. ‘11월 고용동향’에 의하면 작년 대비 15~59세 취업자 규모는 63만 명이 줄었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연령층은 구직자가 몰려 있는 20대와 30대. 대기업 채용은 쥐꼬리만큼 늘어난 반면, 중소기업에서 55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력서를 백번 냈지만 여전히 백수, 합격과 대기통지를 동시에 받는 일이 다반사다. 일터가 소멸된 임시직과 서비스직의 생계는 더 혹독할 것이다. 점포를 접은 가장이 배달 사고를 당한 비극, 마트에서 쫓겨난 점원이 노숙자로 전전하는 비극은 빠르게 퍼져 나간다.
 
한국의 활력소 자영업은 더 무너질 것도 없다. 벌써 도소매 16만 명, 숙박·음식업 16만 명해서 32만 명 가량이 거리로 내몰렸다. 자영업주는 손해를 감수하고 문을 연다. 다른 방도가 없다. 거기에 임대료와 각종 보험료가 급등했으니 일찍 접고 구직자 대열에 동참하는 게 현명할지 모른다. 내년 말, 300만 점포 중 얼마나 살아남을까.
 
선진국은 국가적 구재(救災)에 시동을 걸었다. 숙박업, 식당, 오락실, 관광, 도소매업, 술집, 건강관리, 미용실 등 매출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업체 지원에 나섰다. 일상의 저변을 지켜준 시민의 벗이다. 한국에선 과열경쟁에 지친 마스크 생산업체도 파산 행렬에 끼었다. 생필품, 일용품 기근현상에 대비해야 한다.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단언컨대 아니다. 백신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차례가 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백신도 서너 차례 맞아야 한다. 세계에서 접촉 밀도가 가장 높은 한국사회는 코로나 ‘장기지속’에 취약하다. 방역은 기본, 범국가적 구재(救災)에 나서야할 이 때 독주하는 정권의 정의(正義) 행진곡에 국민은 더 지쳤다. ‘닥치고 봉쇄’야 견딘다 해도, 매월 날라드는 증세 공과금은 저승사자다. 종부세, 재산세, 건보료가 불쑥 올랐다. 임차인보호에 영세임대인은 악덕주가 됐고, 영세상공인은 ‘52시간 노동’ 인건비를 감당하느라 대출금을 늘려야 한다. 시정의 비탄을 아랑곳 않는 무지(無智)의 정책열병식에 취흥을 돋우는 거여(巨與) 군악대의 합주는 슬프다.
 
올해 마지막 칼럼에서 필자는 희망찬 노래를 부르고 싶다. 그런데 왜 절망적인가? 장기지속 팬데믹은 정부역량과 의료체계 담장을 이미 넘어섰다. 그걸 인정한다면 정권과 실세집단은 특단의 대책이 있는가? 중하층 시민들과 청년층의 생존 기반이 다 무너진 이 위급한 와중에 무슨 정의가(歌)인가? 뒤집힌 세계, 절반의 국민이 스러진 무덤 위에 검찰개혁의 깃발을 꽂든, 기업규제의 완결을 알리는 폭죽을 터트리든 무슨 소용이 있으랴. 1980년대 사고(思考)로 사회 붕괴 팬데믹을 감당하려 하는가? 희망을 지피고 싶은 연말, 새벽 여명은 야속하고 저녁 어둠은 우울하다. 국민 재앙, K-구재는 어디에?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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