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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 모티브 된 물의 정령 신화를 현대로…베를린 수상작 '운디네'

중앙일보 2020.12.18 13:06
 
24일 개봉하는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영화 '운디네'. 북서유럽 물의 정령 운디네 설화를 현대 독일 베를린 무대로 재해석했다. 사진은 영화의 주인공 운디네와 크리스토프. [사진 엠엔엠인터내셔널]

24일 개봉하는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영화 '운디네'. 북서유럽 물의 정령 운디네 설화를 현대 독일 베를린 무대로 재해석했다. 사진은 영화의 주인공 운디네와 크리스토프. [사진 엠엔엠인터내셔널]

짝사랑에 절망한 남자가 숲속 호수에서 물의 정령 ‘운디네’를 부르자, 운디네가 나타나 그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 인간 남자와 결혼하면 운디네는 영혼을 얻어 소원하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만약 남자가 배반할 경우 그는 죽게 된다. 그러나 운디네가 사랑을 준 남자는 남들 눈에 더 매력적으로 비친다는 게 비극이다. 결국 짝사랑 상대에게로 떠난 남자를, 운디네는 품에 껴안고 물거품을 일으켜 익사시킨다. “내 눈물로 그를 죽였다!” 외마디 비명만 남기고 신화의 세계로 다시 사라지며.

24일 개봉 판타지 멜로 영화 '운디네'
남자에 배신당한 운디네 신화 재해석
올초 베를린영화제 여자배우상 수상

 

'인어공주' 모티브 된 운디네의 진화

그리스 신화에서 그 유래를 찾는 운디네 설화다.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시기 재조명되며 독일 작가 프리드리히 드 라 모토 푸케의 1811년 동명 중편 소설부터 안데르센 동화 ‘인어공주’까지, 희곡‧발레 등으로 숱하게 변주됐다. 24일 개봉하는 영화 ‘운디네’는 이를 현대 독일 베를린의 도심 속에 신비롭게 옮겨온 작품이다. 독일 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가 남성들의 욕망에 휘둘려 비극을 맞는 운디네를 스스로 사랑과 운명을 선택하는 주체적인 인물로 재해석했다.  
그의 전작 ‘트랜짓’(2018)의 주연 파울라 베어, 프란츠 로고스키가 다시 뭉쳐 만들었고, 올초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파울라 베어가 은곰상-여자연기상을 차지했다.  
 

남성들이 만든 저주 끊어낸 재해석

영화는 막 연인에게 실연당한 운디네의 눈물로 시작한다. 정해진 운명대로 연인을 죽이기도, 다시 정령의 호수로 돌아가기도 원치 않던 운디네에게 벼락처럼 새로운 사랑이 닥쳐오며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러 신화가 힘을 가진 여성 신들에게 투영해온 상투적인 묘사, 즉 ‘질투의 화신’ ‘배신의 희생양’이란 족쇄를 끊고 운디네는 자신만의 사랑을 개척한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전작 '트랜짓' 주연 배우 파올라 베어, 프란츠 로고스키(사진)가 이번 영화로 다시 뭉쳤다. [사진 엠엔엠인터내셔널]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전작 '트랜짓' 주연 배우 파올라 베어, 프란츠 로고스키(사진)가 이번 영화로 다시 뭉쳤다. [사진 엠엔엠인터내셔널]

페촐트 감독은 1990년대 스위스 언어학자 페터 폰 마트의 『낭만주의적 배반-문학에 나타난 배신자들』를 읽고 운디네의 사랑이란 주제에 흥미를 가진 뒤, 독일 여성 작가 잉게보르크 바흐만이 운디네를 화자로 내세운 단편소설 ‘운디네 떠나다’(소설집 『삼십세』 수록)에서 영화의 단초를 얻었다. “100년 일찍 태어나는 바람에 지금이라면 필요 없는 투쟁을 벌여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마도 운디네가 그런 존재인 것 같다”는 그는 “바흐만의 소설 속에서 저주는 남자들이 늘 배신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사랑한다. 여성의 관점에서 이 저주를 끊는 것이 (시대 변화에 걸맞은) 올바른 내러티브 방식이라고 봤다”고 영화사에 밝혔다.  
 

신자유주의의 미스터리…'버닝'과도 맞닿아

'운디네'에서 도시 역사가인 운디네가 박물관 투어 가이드를 위해 도시 모형 앞에 선 모습이다. 주연 파울라 베어는 이 영화로 올 2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여자배우상을 받았다. [사진 엠엔엠인터내셔널]

'운디네'에서 도시 역사가인 운디네가 박물관 투어 가이드를 위해 도시 모형 앞에 선 모습이다. 주연 파울라 베어는 이 영화로 올 2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여자배우상을 받았다. [사진 엠엔엠인터내셔널]

현대 베를린 무대에 전설을 새겨낸 방식도 흥미롭다. 페촐트 감독에 따르면 베를린은 습지 위에 세워졌지만, 도시를 만들기 위해 물을 빼내며 습지에 깃들었던 신화와 전설도 자취를 감췄다. 이런 “조립된 현대 도시, 자신의 역사를 계속해서 지워나가는 도시”(페촐트 감독)에서 도시 역사가로 사는 운디네는 그런 베를린의 과거를 박물관 투어 해설을 통해 끊임없이 환기한다. 운디네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유일한 남자 크리스토프의 직업은 호수에 침전된 흔적들을 기록하는 잠수부다. 베를린의 옛 기억을 간직한 두 사람의 사랑은 이제 신화가 점지한 운명이 아니라 신화 그 자체가 설 자리 없어진 세상으로 인해 위협받는다. 운디네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외면해온 운명을 가장 파괴적인 방식으로 수행하고야 마는 결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여전히 전설을 간직한 듯한 수중 VFX 장면들뿐 아니라, 단기 임대아파트, 비정규직, 난민 문제 등 삶의 지속성을 뒤흔드는 현실이 현대 사회에서 신화의 빈자리를 채우는 미스터리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이웃에 살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춰도 찾을 길이 없다는 묘사는 이창동 감독이 영화 ‘버닝’에서 그렸던 우리네 요즘과도 닮았다. “이 세상에 비정치적 이야기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는 늘 내러티브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페촐트 감독의 말이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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