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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펀치를 가진 아웃복서' 김아림의 뜨거운 겨울 US오픈

중앙일보 2020.12.15 16:26
김아림. [AFP=연합뉴스]

김아림. [AFP=연합뉴스]

김아림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대한항공에 다니던 아버지와 함께 놀려고 골프를 시작했다. 수영, 농구, 태권도, 육상 등 안 해본 운동이 거의 없었다. 덩치도 좋고 운동신경이 좋아 조금만 해도 쑥쑥 늘었다. 김아림은 도전을 좋아한다. “너무 쉬워 다른 운동은 재미가 없었다”고 김아림은 말했다.
  
골프는 해도 해도 잘 안 됐다. 김아림은 2부 투어에서 뛰던 2015년 KLPGA 투어에 “골프는 정답을 못 찾고 죽을 것 같지만 그래서 행복해요”라고 했다. 그 해 김아림은 2부 투어 4승을 하고 이듬해 1부 투어에 올라왔다.

 
키 175cm에 장타를 치는 김아림은 2018년 첫 우승을 했다. 박성현을 이을 차세대 스타로 꼽혔다. 장타만큼 주목받은 게 환한 미소와 배꼽 인사다. 팬들이 박수를 보내면 마치 유치원 꼬마가 그러듯 두 손을 배 위에 놓고 인사한다. 
 
천성이 공손하다. 그는 “캐디에게 클럽을 돌려줄 때도 양손으로 건네면서 인사했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자제하고 있다”고 했다. 김아림은 “눈 뜨면 골프 생각할 수 있어서 좋고, 자면서도 좋다. 사람들이 그렇게 좋으냐면서 이해를 못 하기도 한다. 성적 안 좋으면 속상하기도 하지만 매사에 충실히 하면 언젠가는 빛을 보는구나 생각이 든다”라고 했다.
  
그렇게 성장하던 김아림은 지난해 10월 암초를 만났다. 하나금융그룹챔피언십에서 벙커에 깊이 박힌 공을 경기위원의 허락을 받고 꺼내 확인했다. 다시 놓을 때 원래 있던 것 보다 더 좋은 상태로 놓고 쳤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시청자 제보 등으로 논란이 됐다.
  
함께 있던 경기위원이 문제없다고 유권해석했기 때문에 김아림이 책임질 일은 없다. 그러나 그는 “동료 선수와 협회 등에 피해를 준 것 같아 책임지겠다”며 기권했다.  
 
김아림. [AP=연합뉴스]

김아림. [AP=연합뉴스]

골프는 멘탈의 스포츠다. 이후 김아림의 성적이 좋지 않았다. 올해는 코로나까지 겹쳤다. 우울한 2020년이었다. 그의 미소와 배꼽 인사가 점점 줄었다. 올해 그의 상금 랭킹은 21위까지 떨어졌다.
 
메이저대회는 대부분 여름에 열린다. 해가 가장 길 때, 가능한 많은 선수가 참가해 기량을 겨루게 한다. 올해 US오픈은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12월에 열렸다. ‘12월의 US오픈’은 ‘8월의 크리스마스’만큼 모순적인 말이다.

 
김아림으로서는 이 모순이 행운이었다. 김아림은 US여자오픈에 한 번도 나가보지 않았다. 도전해 볼 수 있었지만 지역예선이 KLPGA 투어 일정과 겹치거나, US오픈에 다녀올 경우 시차 적응 문제 등으로 국내 투어에서 어려움을 겪을까 우려해서다.
 
코로나 19로 올해는 사정이 다르다. 12월 US오픈이라 미국 대회 참가에 문제가 없었다. 김아림에겐 자동 출전권도 나왔다. 디 오픈이나 US오픈 등 오픈(open)이라는 이름이 붙은 대회는 말 그대로 열린 대회다. 지역예선 등을 통해 문호를 활짝 열어두고 누구든 참가해서 실력을 겨루자는 뜻이다.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지역예선이 열리지 못했고 이 선수들을 채워야 했다. 주최 측은 평소 세계 랭킹 50등까지 주던 출전권을 75위까지로 늘렸다. 김아림은 70위였다. 
 
그의 아이언을 후원하는 미즈노의 피팅 담당 박재홍 팀장은 US여자오픈 출전을 앞두고 김아림의 클럽을 보고 놀랐다. 3개월 만에 클럽 페이스가 닳았기 때문이다. 
 
여성 프로의 경우 아이언을 1~2년을 써도 문제가 없다. 김아림은 남자 선수처럼 헤드스피드가 빠르고 어택앵글이 날카로워 빨리 해진다. 그렇다 해도 3개월은 너무 빨랐다. 박팀장은 “연습을 독하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15일 미국 텍사스 주 휴스턴의 챔피언스 클럽에서 막을 내린 US오픈은 드라마틱했다. 선두와 5타 차 9위로 최종라운드를 시작한 김아림의 우승은 어려워 보였다. 김아림은 마지막 세 홀을 버디-버디-버디로 한 타 차 우승했다.
  
김아림은 닥치고 공격 스타일은 아니다. 이미 10대 때 “나는 복싱으로 치면 핵 펀치를 가진 아웃복서다. 수비적으로 경기하지만, 확신이 설 때면 공격한다”고 했다. 버디를 잡은 마지막 세 홀에서 드라이버를 한 번도 안 쓴 게 특이하다. 그는 우드와 하이브리로 티샷했다. 언제 참을지, 언제 공격할지 냉정하게 판단하고 경기했다.

 
김아림은 우승 인터뷰에서 “박세리보다는 안니카 소렌스탐을 동경했다”고 했다. 놀랍게도 이날 소렌스탐이 USGA 관계자를 통해 김아림에게 영상통화로 "잘했다. 우승을 즐겨라"고 축하해줬다. 김아림은 환호성을 지르며 "정말 고맙습니다. 사랑해요!"라고 인사했다.

 
골프 여제 소렌스탐은 25세 때 US오픈으로 LPGA 투어 첫승을 거두고 72승의 금자탑을 쌓았다. 김아림도 25세에 US오픈에서 첫 LPGA 우승을 차지했다. 장타를 가진 김아림은 KLPGA 투어보다 LPGA 투어가 더 맞을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김아림은 왜 마스크를 착용하고 경기했느냐는 질문에 "내가 걸리는 건 무섭지 않은데, 다른 누구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어 마스크 쓰고 치는 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의 우승이 누군가의 기쁨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외환위기 시절 국민들의 어려움에 위안을 준 박세리가 연상된다. 김아림도 올해 마음이 많이 아팠다.  
 
성호준 골프전문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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