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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점 언론에 흘리고 정책도 무시" 스가의 배신, 아베 분노

중앙일보 2020.12.13 05:00
지난 3일, 일본 도쿄지검 특수부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의 재임 중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 아베 전 총리에게 '임의 사정청취(조사)'를 요청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아베 총리가 국가 행사인 '벚꽃을 보는 모임' 전야제에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고급 호텔로 불러 그 비용의 일부를 대납했다는 이른바 '벚꽃 스캔들'과 관련해서다.
 

'벚꽃 스캔들' 검찰조사 정보, 총리관저가 흘린 듯
언론 "검찰-스가, '아베로부터의 탈각' 이해 일치"
아베, 건강 회복해 활발한 활동…"스가 불쾌할 것"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왼쪽)가 지난 9월 14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새 총재에 선출된 스가 요시히데 당시 관방장관에게 꽃다발을 건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왼쪽)가 지난 9월 14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새 총재에 선출된 스가 요시히데 당시 관방장관에게 꽃다발을 건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전임 총리에 대한 검찰 조사는 일본에서 드문 사건이다. 게다가 이 보도가 그동안 '친정부' 성향으로 분류됐던 요미우리(讀賣) 신문과 공영방송 NHK에서 제일 먼저 나왔다는 데 관심이 모아졌다.
 
정부의 눈치를 봐 왔던 이 매체들이 전임 총리 아베의 '흠결'을 보도한 데는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현 총리의 '암묵적 승인'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해석이다. 
 
아베 정권에서 8년간 '총리의 입' 역할인 관방장관을 맡았던 스가 총리는 취임 일성으로 '아베 계승'을 내세웠다. 하지만 취임 3개월, 스가가 달라지고 있다는 관측이 이어진다.
 
아베 주변 인사들의 크고 작은 돈 문제가 연이어 공개되고, 아베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정책들도 조금씩 뒤집히고 있다. 내년 9월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연임해 '3년 더'를 노리는 스가 총리가 '아베의 재부상'을 막기 위해 본격적인 거리 두기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아베 검찰 조사' 정보, 총리 관저서 나왔을 것" 

아사히 신문 계열 주간지 아에라는 지난 7일 발매된 최신호에서 검찰이 아베 총리의 '벚꽃 스캔들'을 본격 조사하기 시작한 건 "검찰과 총리관저가 '아베로부터의 탈각(脫却)'이라는 공동의 목표에 동의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한 검찰 관계자는 아에라에 "몇몇 언론에 먼저 보도된 '검찰의 아베 수사' 정보는 미리 검찰의 보고를 받은 총리 관저에서 흘러나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일본 검찰은 아베 때문에 체면을 구긴 적이 있다. 올해 초 아베가 자신의 최측근이던 구로카와 히로무(黑川弘務) 당시 도쿄고검 검사장의 임기를 늘리기 위해 검찰청법 개정을 시도하면서다. "측근에게 특혜를 주려 법까지 개정하냐"는 비판이 이어졌고, 결국 개정은 무산됐다. 이후 구로카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비상사태 때 내기 마작을 즐긴 사실이 밝혀져 사직했다.
 
일본의 주간지 슈칸분슌은 지난 5월 20일자 발간호에서 당시 아베 총리가 차기 검찰총장으로 유력 검토하고 있던 구로카와 히로무 도쿄고검 검사장이 내기 마작을 했다고 보도했다. 사진은 슈칸분슌의 관련 보도. 서승욱 기자

일본의 주간지 슈칸분슌은 지난 5월 20일자 발간호에서 당시 아베 총리가 차기 검찰총장으로 유력 검토하고 있던 구로카와 히로무 도쿄고검 검사장이 내기 마작을 했다고 보도했다. 사진은 슈칸분슌의 관련 보도. 서승욱 기자

검찰로서는 당시 잃어버린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아베를 겨냥했고, 스가 총리도 그에 동의했을 것으로 아에라는 분석한다.
 
그러나 아베 수사의 '불똥'이 스가 정권에게까지 튀는 것을 막기 위해 아베의 비서와 회계 책임자를 정치자금 규정법 위반(불기재)으로 약식기소하는 선에서 사건은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벚꽃 스캔들' 외에도 아베 관련 돈 문제는 연이어 터지고 있다. 교도통신은 9일 아베 전 총리가 대표를 맡고 있는 자민당 야마구치(山口)현 제4선거구 지부가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독점금지법 위반 지적을 받은 기업인 제약회사 니혼케미파로부터 정치 헌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도덕적으로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아베 내각서 농림수산상을 지낸 요시카와 다카모리(吉川貴盛) 의원과 니시카와 고야(西川公也) 내각관방 참여도 아베 재임 시절 대형 양계업체인 '아키타푸드'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아베 "계승한다더니 무시" 분노

정책 차별화 움직임도 나타난다. 10일 아사히신문은 일본 정부가 아베 정권이 주창했던 방위 목표인 '적 기지 공격 능력'이란 표현을 방위정책에 명시하지 않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논란을 부를 수 있는 '적 기지 공격' 등의 표현을 버리고 '억지력 강화'로 완화해 관련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일종의 '꼼수'다.
 
지난해 4월 신주쿠교엔 (新宿御苑)에서 개최된 '벚꽃 보는 모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참석자들 앞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사진=지지통신]

지난해 4월 신주쿠교엔 (新宿御苑)에서 개최된 '벚꽃 보는 모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참석자들 앞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사진=지지통신]

하지만 아베 전 총리가 '적 기지 공격'이라는 표현에 애착을 갖고 "다음 정권에서도 이어가길 바란다"고 당부까지 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스가가 아베에 '반기'를 든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10일 자로 발매된 주간지 슈칸분슌은 이와 관련, "아베와 스가 사이에 '틈'이 생기고 있다"면서 아베가 이런 스가의 '계승 무시' 움직임에 분노했다고 측근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슈칸분슌에 따르면 스가는 '적 기지 공격 능력' 외에도 역사 교과서 문제 등에 있어 앞서 아베가 결정한 지침을 따르지 않고 있다. 아베는 재임 당시 역사 교과서 내 징용 문제에 관한 기술 부분을 시정하라고 관계 부처에 지시했다.
 
하지만 스가는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의 반발을 우려해 이를 물밑에서 무마시켰다고 한다. 아베 측근은 "실무자형인 스가 총리는 보수 사상에 대한 관심이 그리 높지 않다"고 말했다. 
 
결국 화가 난 아베 총리는 총리 전권 사안인 중의원 해산, 조기 총선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고 잡지는 전했다. 여러 자리에서 "내가 총리라면, 이 정도 지지율일 땐 중의원을 해산할 것"이라는 '도를 넘는'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덕성 타격, 정치적 재부상 어려울 듯  

8월 말 사임 발표 때만 해도 병색이 완연했던 아베 전 총리는 최근 부쩍 건강해진 모습으로 여러 자리에 얼굴을 내비치고 있다. 지병인 궤양성 대장염 치료가 잘 돼 몸 상태가 아주 좋다고 한다. 일부에서 그의 사임에 대해 "건강은 핑계일 뿐 검찰 수사를 피하는 게 목적이었다"는 말까지 나오는 이유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지난 4일 오후 일본 국회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도쿄지검 특수부의 수사와 관련해 발언하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지난 4일 오후 일본 국회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도쿄지검 특수부의 수사와 관련해 발언하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그가 속해있는 자민당 최대 파벌인 '호소다파'에서는 건강을 되찾은 아베가 내년 총재선거에 다시 출마하기를 권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도쿄의 한 소식통은 "아직 재임 1년도 되지 않은 스가 총리가 들었다면 당연히 불쾌함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벚꽃 스캔들'에서 아베 측의 위법 사실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만큼 도덕성에 타격을 입은 아베의 재부상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에라는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해 '위법 사실이 없다'고 주장해왔던 아베가 "국민 앞에서 사실관계를 제대로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쿄=이영희 특파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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