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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철의 시선] 선한 권력은 없다

중앙일보 2020.12.10 00:24 종합 30면 지면보기
최현철 논설위원

최현철 논설위원

9일 국민의 힘이 진행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의사진행 방해)는 여당의 압도적 의석수 앞에서 무력했다. 반대로 과거 이 제도 덕을 톡톡히 본 여당은 그 파훼(破毁)법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여당 집권 후 테러방지법 방치
검찰 개혁 위해 만든 공수처도
여당 방패막이로 전락할 우려

필리버스터는 1973년 폐지됐다 2012년 국회선진화법에 포함되며 소생했다. 실질적인 부활은 2016년 2월 23일 이뤄졌다.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이 테러조직에 대해 영장 없이 추적·감청 등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국가정보원에 주는 내용이 포함된 테러방지법을 추진했다.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컸지만, 과반 의석을 가진 여당 앞에서 야당의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결국 마지막에 꺼낸 카드가 필리버스터였다.
 
김광진 의원이 첫 발언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모두 반신반의했다. 세 번째 주자로 나선 은수미 의원이 10시간을 넘겨 기존 기록을 깼다. 그 뒤로도 연일 기록 경신이 이어지자 생중계하던 국회방송의 시청률이 사상 최고치로 치솟았고 외신들도 관심을 보였다. 8일간 이어진 필리버스터는 세계 최장 기록으로 남았다. 기록만큼이나 연설에 나선 38명의 발언도 주목을 받았다. 국정원의 흑역사가 시민들 기억에 소환됐고, 민주주의와 인권, 헌법적 기본권에 대한 재인식이 퍼졌다.
 
여론에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미세하게 앞서던 테러방지법 찬성 의견이 8일 만에 반대 우세로 바뀌었다. 여야의 지지율까지 역전됐다. 이어진 선거에서 여당은 과반 의석을 상실했다. 무엇보다 이 법을 추진한 새누리당과 국정원은 인권과 민주주의 파괴자라는 음습한 이미지를 떠안았다.
 
다수당이 된 민주당은 탄핵을 주도한 끝에 정권까지 접수했다. 지난 4월 총선에선 압도적 지지를 받아 거대 여당으로 거듭났다. 그런데 악법이라며 애타게 부르짖었던 테러방지법을 그대로 방치했다. 오히려 감염병 확산 행위를 테러로 규정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의안을 나누고 회기를 쪼개 필리버스터를 무력화하는 ‘살라미 전술’도 그들 머리에서 나왔다. 역시 선한 권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에 논란이 된 공수처법 개정안도 일단 통과되면 결국 여당의 방패막이로 쓰일 것이란 우려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공수처는 이 정부에서 검찰개혁의 상징이다. 검찰을 개혁해야 한다는 말이 널리 공감대를 얻은 것은 그만큼 검찰의 폐해가 컸기 때문이다. 근원은 검찰이 기소권과 수사권을 독점하는 데서 시작됐다. 이를 바탕으로 정권의 비리에 눈감고, 야당 탄압에 적극 나섰다. 무리한 수사로 국민의 인권을 짓밟고, 반대로 자신들의 허물은 어물쩍 덮었다. 검찰에 집중된 권한을 분산하는 게 개혁의 핵심일 수밖에 없다. 현 정부는 대부분의 수사권을 경찰에 넘기고, 고위 공무원에 대한 수사는 공수처라는 별도 기관을 만들어 맡기는 방식을 택했다.
 
문제는 공수처의 권한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고위공직자의 비위에 관한 한 다른 기관이 수사하던 사건도 공수처에 알려야 한다. 다른 사건을 수사하다 공직자 비위 단서가 나와도 마찬가지다. 공수처는 이를 받아서 입맛에 맞는 사건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시 떠넘길 수 있다. 특히 판·검사와 경찰이 관련된 사건은 기소와 공소유지까지 공수처가 맡는다.
 
권한은 막강한데 견제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오로지 탄핵과 징계만 가능한데, 징계위도 자체적으로 운영한다. 그런 징계위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현재 법무부가 여실히 보여줬다. 그나마 있던 견제장치가 공수처장 후보를 추천할 때 야당에 비토권을 주는 것이다. 이번 개정안은 이마저도 없애겠다는 것이다. 수사 검사의 자격 조건(10년 이상 변호사 자격 보유자 중 수사·재판·조사에 5년 이상 종사)도 변호사 자격 7년 이상으로 낮췄다. 자기편에서 인물을 구하기 쉽지 않게 되자 문턱이 확 낮춘 것이다.
 
연내 공수처 출범을 재촉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일단 윤석열 검찰총장을 징계하고 나면 이후 정권 관련 수사는 공수처가 모두 거둬갈 수 있다. 법원이 집행정지를 받아줘도 복귀한 총장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윤 총장 발을 묶는 과정에서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그 추종세력들이 아무리 불법과 위법을 저질러도 처벌받을 걱정이 없어진다. 검사의 직권 남용은 대표적인 공수처 수사대상이다. 원전 자료 삭제, 옵티머스와 라임 펀드 사기 사건, 울산 시장 선거개입 사건 중 아직 기소를 못 한 사람들에 대한 수사도 마찬가지다.
 
장관 후보자들은 청문회 걱정을 덜 수 있다. 국회 위증죄가 공수처 소관이기 때문이다. 정치자금법에 민감한 정치인도 소속에 따라 희비가 엇갈릴 것이다. 이런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독재’ 말고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최현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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