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화리조트 산정호수 온천사우나의 때밀이 김순철(가명)씨.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본명을 감추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43년 경력의 장인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프롤로그
끝내 그가 인터뷰를 승낙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얼굴 드러나는 사진은 안 되고, 본인을 특정할 수 있는 일부 사실은 숨기고, 본명도 감추기로. 하여 경기도 포천 한화리조트 산정호수 안시의 ‘때밀이’ 김순철(가명·71)씨가 탄생했다. 흔히 ‘세신사(洗身師)’라 부르는 것도 알고 ‘목욕관리사’란 더 고상해 보이는 명칭도 알지만, 때밀이라 적는다. 국립국어원이 이 단어만 인정하고 있어서다. 당당히 때밀이라고 적어 이 낱말에 밴 편견과 괄시의 시선에 어깃장을 놓고 싶었다. 그리고 묻고 싶었다. 당신은 한 번이라도 타인의 지친 몸을 어루만져준 적 있는가.
1막 : 그늘에서 일하고 싶었다

김순철(가명)씨의 한 평 남짓한 작업 공간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열여섯 살, 고향을 뜨기로 작정했다. 친구 5명과 상경을 작당했다. 부모가 반대하고 나섰다. 열흘 가까이 식음을 전폐하고 시위했다. 마침내 부모는 아들의 상경을 허락했다. 아들이 떠나기 전 어머니가 병아리 한 마리를 삶아 줬다. 그때 먹었던 백숙의 맛을 여태 잊지 못한다. 어느 여름날 소년은 완행열차에 올라탔다. 가방에는 책 8권이 들어있었다.
서울 삼양동의 의류공장에 들어갔다. 일손이 모자랐던 시절, 기계 돌리는 법만 익히면 일할 수 있었다. 서울 제기동 자취방에서 1시간을 걸어 출근했고, 기계 앞에 서서 꼬박 14시간을 일했다. 한 달에 하루만 쉬고 일했는데, 방값 내면 남는 게 없었다. 군대에 갔다 왔고, 아는 사람 통해 잠실 아파트단지 목욕탕에 취업했다. 1978년의 일이다.
첫 손님을 잊지 못한다. ‘김 사장님’은 초보 때밀이의 서툰 손길을 묵묵히 받아줬다. 그리고 2만원을 쥐여줬다. 차마 돈 받을 생각도 못 했는데…. 김 사장님은 이후로 긴 세월 단골이 되었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평생을 목욕탕에서 밥을 벌 줄은. 그렇다고 다른 벌이를 힐끗거렸던 건 아니다. 하루하루 살아갔을 따름이다.
2막 : 월수입 1200만원 시절

한화리조트 산정호수 온천사우나 남탕 풍경. 12월 4일 방문했을 때 영업이 중단된 상태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순철씨는 사우나 업계의 전설이다. 43년간 자리를 지킨 사람도 드물거니와 80∼90년대엔 때밀이 장인으로 소문이 자자했었다. 호텔에선 정확히 매일 30명씩 손님을 받았다. 요금 4만5000원 중 1만5000원이 김씨 몫이었다. 이렇게 하루 45만원, 한 달에 1200만원이 넘는 현금이 들어왔다. 주중엔 일본인 관광객, 주말엔 정치인과 기업인이 찾아왔다.
손님 한 명당 20분이 걸리니 하루에 손님 30명을 받았다는 건 하루에 10시간씩 때를 밀었다는 뜻이다. 저녁이면 체중이 2㎏씩 빠졌다. 낮에 제대로 못 먹었던 밥을 허겁지겁 먹고 뻗으면 이튿날 몸무게가 돌아왔다. 그렇게 8년을 살았다.
지금은 그때처럼 벌지 못한다. 때밀이뿐 아니라 사우나 운영·관리도 맡았으나 수입은 한창때 절반도 못 된다. 코로나 사태를 맞은 올해는 그 절반도 안 된다. 수입이 너무 줄어 서울 집의 아내가 “두 집 살림하는 것 아니냐” 묻기도 했다. 요즘엔 주말이면 아내와 아들이 일을 도와주러 온다. 산정호수 풍경이 어릴 적 떠났던 고향처럼 편안하다.
3막 : 남북정상회담 이튿날 걸려온 전화

43년 경력의 때밀이 장인 김순철(가명)씨의 손. 손이 유난히 크고 두툼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연예인 단골 중엔 남궁원씨가 기억난다. 얼굴을 수건으로 칭칭 감싸고 나타났다. 심지어 한쪽 눈도 가렸다. 눈에 띄는 걸 그렇게 꺼리면서도 매주 때를 밀러 왔다. 돌아간 원로 가수도 생각난다. TV에서 보이는 온화한 이미지와 달리 그는 사람을 함부로 대했다. 늘 특별한 대우를 요구했고 제 자랑만 늘어놨다. 팁은커녕 음료수 한 병도 안 사줬다. 오금동 시절, 날마다 때를 미는 어르신이 있었다. 90년 오금동을 떠날 때 83세라 했으니 지금은 돌아갔겠다.
조폭 단골도 많았다. 오랫동안 부산 칠성파가 단골이었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하자 사우나가 하루아침에 목포파 세상으로 바뀌었다. 다들 덩치가 크고 문신이 많아서 다른 손님 눈치가 보였지만, 팁을 넉넉히 줘 고마웠다. 일본 야쿠자 단골도 있었다. 그가 나타나면 업장의 다른 조폭이 금세 사라졌다.
4막 : 장인의 루틴

김순철(가명)씨가 때 미는 요령을 알려주고 있다. 수건을 감싼 때 타월을 지그시 누르면서 밀어야 아프지 않고 때가 잘 나온다고 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는 때밀이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런데도 “별 기술은 없다”고 말했다. 열심히, 정성껏, 성의껏. 이 단어를 수십 번 사용했다. 대기 손님이 많이 있으면 대충 할 수도 있었을 텐데, 1시간에 4명 받은 적은 없단다. 그의 작업장엔 오래전 산 손목시계가 놓여 있었다.
“요즘엔 요금을 2만원 받아요. 20분에 2만원이니 1분에 1000원꼴이잖아요. 힘들고 어려우면 ‘1분에 1000원 버는 일이다’ 생각하며 스스로 달래요.”
에필로그

사우나 작업장에 놓인 김순철(가명)씨의 시계. 김씨는 '손님 한 명당 20분'을 원칙처럼 지켰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평생 일만 해서, 놀 줄을 몰라요. 비행기도 안 타봤고 제주도도 못 가봤어요. 나 같은 사람은 일을 안 하면 아파요.”
목욕은 위생 활동 이전에 종교 제의였다. 죄를 씻는 의식으로 인간은 몸을 닦았다. 때를 허물이라고도 한다. 남의 허물을 벗겨주는 일처럼 신성한 노동이 또 있을까. 그가 제 일을 자랑스러워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열심히 살았다는 건 말할 수 있다. 유난히 두툼한 그의 손을 한참 바라봤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