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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문 대통령, 참호에서 나와야 한다

중앙일보 2020.12.08 00:36 종합 35면 지면보기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달 말 새 외교안보팀을 소개하는 장면은 인상 깊었다. 그는 “(이들이) 내가 듣고 싶은 말보다 내가 들어야 할 말을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애브릴 헤인스 국가정보국장 후보자는 “권력자에게 진실을 말하겠다”고 답했다. ‘불편한 말을 해달라’는 대통령과 ‘그러려고 이 자리를 수락했다’는 국가정보국장. 권력을 사유화했던 트럼프 암흑기를 지나 미국이 미국답게 돌아온 것이다. 우리는 언제쯤 저런 날이 올까. 부러우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586과 문파가 지키는 참호에 은둔
닥치고 대동단결…이견 내면 응징
진보 측 “대통령께 의견전달 안돼”
갈수록 더 고립되고 위험해질 것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문재인 정부도 첫 장면은 비슷했다. 2017년 5월 첫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임종석 비서실장이 대통령에게 “지시 사항에 이견을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박근혜 정부 내내 들어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다. 놀라운 진전이었다. 문 대통령은 멋지게 응수했다. “대통령 지시에 이견을 내는 건 의무”라고. 말뿐이었다. 3년 반 넘도록 참모들이 직언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누가 봐도 낯뜨거운 윤미향 비리, 박원순 성추행 관련해 대통령 주변 그 누구도 바른말을 하지 않았다. 대통령도 비정하게 침묵을 지켰다.
 
진보 진영에서도 “이건 아닌데”라는 우려가 나온다. 진보 측 한 원로는 이런 말을 했다. “대통령이 586 운동권에 둘러싸여 민심을 모른다. 예전에는 편하게 얘기를 나눴는데, 요새는 만나는 건 고사하고 의견을 전달할 길이 없다.” 많이 들어본 얘기 아닌가. 박근혜의 ‘문고리 3인방’이 ‘586 운동권’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586 참모들을 다시 ‘문파’라 불리는 극렬 지지층이 둘러싸고 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대통령과 운동권이 한 덩어리로 뭉쳐있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입바른 소리를 하면 변절자로 낙인 찍힌다.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 배신은 동료의 죽음이나 고문으로 이어졌다. 일사불란, 대동단결이 최우선 덕목이었다. 그 운동권 문화가 문재인 정부를 지배한다. 어깨동무하고,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흔들리지 않게’를 부르던 1980년대 모습 그대로다. 위법인 줄 알면서 윤석열 검찰총장 찍어내기를 강행하는 용기(?)도 이런 집단사고에서 나온다.
 
친문 진영의 주모 기자가 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비난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문파로부터 “등 뒤에서 칼을 꼽는 비열한 짓”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그가 친문에서 쌓아온 공적은 하루아침에 온데간데없다. 정상 참작도 없다. 가혹한 응징이 있을 뿐이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저서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문재인 정부 불공정에 대해 비판하는 건 불가능하다. 불공정을 문제 삼으면 ‘배부른 소리’나 ‘극우 보수를 돕는 이적 행위’로 간주한다.”
 
트럼프가 대선 패배 후 두문불출하자 미국 언론이 ‘벙커 멘털리티’에 빠졌다고 표현했다. 쏟아지는 포탄을 피해 참호에 웅크리는 현상이다. 박근혜는 웬일인지 취임 초부터 벙커 멘털리티였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조국 사태 이후 악재가 겹치면서 여기에 빠진 것 같다. 지지율이 떨어지고,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도 대통령은 586 참모와 문파가 지키는 참호 속에 숨어있다. 올 초 온양시장 상인이 대통령에게 “(경기가) 거지 같다”고 말했다가 문파로부터 신상털기를 당했다. 문 대통령이 “그 아주머니는 잘못한 게 없다”고 ‘대통령답게’ 정리했으면 그냥 넘어갈 일이었다. 비정한 대통령은 참호에서 끝내 나오지 않았다. 문 대통령이 7일 추미애·윤석열 사태에 대해 처음으로 사과했지만, 진정성이 없다.
 
돌발 상황이나 난처한 일을 불편해하는 문 대통령의 개인 성향도 참호 통치를 부채질한다. 김종인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에 참고할 만한 대목이 나온다. 2016년 문재인 민주당 대표가 김종인에게 비상대책위원장을 부탁했을 때다. “문재인은 수줍은 사람이었다. 배석자가 주로 얘기를 하고 (정작 당사자인) 문재인은 거의 말을 하지 않다가 ‘도와주십시오’라는 말만 거듭했다.”
 
기자협회보에 따르면 역대 대통령의 브리핑·기자간담회 횟수는 김대중 150회, 노무현 150회다. 반면에 박근혜 5회, 문재인 6회다. 스가 일본 총리가 취임 후 기자회견 6회를 하는데 딱 13일 걸렸다. 트럼프는 언론 인터뷰를 200회 가까이했다. 대립 관계인 뉴욕타임스와 인터뷰를 8회나 했다. 도발적인 질문을 받아넘기려면 국정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실정 추궁을 두려워하거나 주요 쟁점을 설명할 자신이 없으면 당황하고, 그런 자리를 자꾸 피하게 된다. 김대중·노무현처럼 내공 깊은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많이 한 건 우연이 아니다.
 
문 대통령은 월성원전 평가조작, 울산시장 선거공작 등 각종 의혹과의 연결고리를 차단하는 게 발등의 불이다. 섣부르게 나섰다가 꼬투리 잡히면 큰일이다. 공수처부터 만들어놓고, 참호에 있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역대 정권에서 그랬듯, 임기 막판으로 갈수록 그 참호는 고립되고, 위험한 곳이 된다.  
 
문 대통령이 ‘긴 침묵과 짧은 유체이탈 발언’을 반복하면서 박근혜와 닮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런데 박근혜는 실패한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이 실패한 대통령과 닮아가는 건 불행한 일 아닌가.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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