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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의 시시각각] 늦장 백신 확보의 전말

중앙일보 2020.12.08 00:35 종합 34면 지면보기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 지난 5월 25일 한국보다 방역에 훨씬 성공한 뉴질랜드는 범정부 차원의 ‘코로나 백신 전략(CVS)’을 발표한다. 1차로 3700만 뉴질랜드달러(약 280억여원)가 투입된 이 사업은 예방약 개발과 함께 최대한 빠른 코로나 백신 확보가 목표다. 이 나라 5월 평균 일일 확진자는 1.1명. 그럼에도 뉴질랜드는 백신 확보 TF팀을 꾸려 곧바로 굴지의 백신 개발 업체들과 접촉했다. 그 결과 지난 10월 화이자 제품 150만 개(75만 명분, 2회 접종) 계약에 이어 11월에는 한 번만 맞으면 되는 얀센 백신 200만 개 구매 및 300만 개 추가 옵션 확보에 성공했다. 총인구 480만여 명이 모두 맞고도 남을 양이다. 지난 10월 말부터 하루 확진자는 한 자릿수다.
 

백신 대책 아닌 K방역 홍보에 골몰
부동산·윤석열 논란에 뒤로 밀려나
늦장 대응 책임 따져 중히 문책해야

# 뉴질랜드가 백신 전쟁에 뛰어들 무렵, 한국 정부는 K방역 자화자찬에 여념이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5월 10일 ‘취임 3주년 특별연설’에서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방역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가 됐으며 바이러스 확산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불행히도 당연히 나왔어야 할 백신 얘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한국의 5월 평균 일일 확진자는 23.5명. 그런데도 정부는 6월 3일 3차 추경을 발표하며 K방역 홍보 예산을 1200억원으로 늘렸다. 범정부 지원위원회가 꾸려졌지만, 외국산 백신 도입을 본격 추진키로 결정된 것은 8월 말이었다. 하지만 백신 도입 사업은 계속 지지부진했다. 결국 ‘늦장 대응’이란 거센 비판 속에서 지난 3일 당국이 확보했다고 알려진 백신은 70%의 낮은 예방률에 신뢰도마저 불안한 아스트라제네카. 요즘 한국의 코로나 확진자는 하루 600명을 넘나든다.
 
안 알려져서 그렇지 그간의 백신 확보를 둘러싼 한국과 외국의 노력을 살펴보면 기가 막힌다. 한국이 K방역 자랑에 정신이 팔릴 때 코로나19에 찌든 선진국은 물론 뉴질랜드 같은 방역 모범국까지 온 힘을 쏟았다. 인구당 백신 숫자에서 1, 3위를 차지한 캐나다·영국은 범정부 태스크포스(TF)를 꾸리면서 제약업계에 훤한 민간 전문가들을 책임자로 영입해 눈부신 성과를 냈다. 3억5700만 회분의 백신 확보에 성공한 영국에선 이 작전을 총지휘한 바이오 벤처 투자 전문가 케이트 빙엄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일본의 움직임도 빨랐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TV에 나와 “백신 확보를 위해 제약사들과 접촉 중”이라고 밝힌 게 지난 6월이었다.
 
이런 경쟁은 코로나 발생 초기부터 예상된 일이었다. 더욱이 백신 전쟁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신종플루가 창궐한 2009년 28만여 명의 희생자가 나오자 미국·영국 등 선진국들은 다투어 거대 제약사들과 접촉, 백신을 싹쓸이했었다.
 
경쟁국들이 백신을 향해 뛰던 5월 말부터 최근까지 정부와 정계는 줄곧 부동산값 폭등, 추미애-윤석열 갈등에다 대북 문제에 얼이 빠졌었다. 정작 국력을 쏟았어야 할 백신 확보는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 외국이 그랬듯 어떤 백신을 살지, 위험 분산을 위해 포트폴리오는 어떻게 짤지 마땅히 논의돼야 할 사안들은 뒷전으로 밀렸다. 그 결과는 알다시피 최고의 효과를 자랑하는 화이자·모더나는 못 잡고 예방률 70%에 안전성마저 불투명한 아스트라제네카와의 계약이다.
 
누구나 예방률 95% 안팎의 화이자·모더나 백신을 맞고 싶어 할 거다. 10명 중 3명에겐 효력이 없다는 백신을 누가 원하겠는가. 백신값을 깎기 위해 서두르지 않겠다는 당국의 변명은 염장을 지른다. K방역 홍보에 1200억원을 쏟아붓는 나라에서, 국민당 40만여원씩 22조여원의 재난지원금을 푼 나라에서 기껏 3만~4만원인 백신 값을 아끼겠다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정부의 무능으로 온 국민의 건강이 벼랑에 선 지금의 백신 파동은 절대 그냥 넘어가선 안 된다. 뭐부터 잘못됐는지 철저히 따져 책임질 일이 있으면 서릿발처럼 문책해야 한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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