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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조각가 권진규 유작 700여 점, 16년 표류 멈출 수 없나

중앙일보 2020.12.07 13:58
한국 조각사에서 근대와 현대를 잇는 역할을 한 조각가 권진규의 생전 당시 모습. [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한국 조각사에서 근대와 현대를 잇는 역할을 한 조각가 권진규의 생전 당시 모습. [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2004년 미술관 건립을 전제로 하이트에 작품 양도→ 2010년 하이트와의 이견으로 작품 돌려받음→ 2015년 다시 권진규미술관을 설립을 전제로 대일광업에 작품 양도→ 2018년 미술관 건립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대일광업(대일생활건강) 상대로 미술품 인도 청구 소송 제기→ 지난 8월 유족 승소→ 9월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 기증 계획 발표→ 11월 초 작품 8점 케이옥션에 출품→ 11월 25일 경매 당일 출품 철회···.
 

권진규 미술관 건립 꿈 두 차례 좌초
유족, 작품 찾기 위해 40억원 돌려줘야
미술관에 기증 위해 유족 빚 내는 상황
"한국 근현대미술 걸작이 처한 비애"
"공공기관 나서야"vs "작품 팔아 빚갚아야"

20세기 한국의 대표적인 조각가 권진규(1922~1973)의 유작이 16년 전부터 지난달까지 떠돈 이력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되도록 그가 남긴 대규모 작품이 변변한 미술관 한 곳에 자리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돈 것이다. 이런 상황은 지난 9월 유족 측인 권진규기념사업회(대표 허경회)가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하겠다고 밝히면서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현재 유족의 '희망사항'이다. 유족의 뜻대로 기증이 이뤄지고 권진규 유작이 공공자산이 되기 위해선 먼저 해결돼야 할 큰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권진규 유작 700여 점은 여전히 표류 중이다. 한국 근현대미술 걸작이 처한 서글픈 풍경이다.
 

기증의 길은 아직 멀다  

권진규, ‘지원의 얼굴’ 1967년작, 테라코타, 50x32x32cm.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권진규, ‘지원의 얼굴’ 1967년작, 테라코타, 50x32x32cm.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지난달 25일 국내 메이저 경매회사인 케이옥션(대표 도현순)에선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경매 당일 권진규의 유작 9점 중 유족 측이 내놓은 8점의 출품이 취소된 것. 그러나 이날 8점은 거래되지 않았고, 같은 날 다른 소장가가 내놓은 '혜정'만 1억8000만원에 낙찰됐다. 유족은 미술품 인도 청구소송에서 승소하자마자 작품을 돌려받으면 미술관에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힌 터였다. 그런데 유족은 기증을 앞두고 작품 일부를 경매에 내놓았다가 다시 거둬들인 것일까. 여기엔 유족의 애끓는 사연이 있다. 
 
지난 8월, 1년 6개월 간 이어진 재판에서 승소한 유족에겐 무거운 숙제가 있었다. 2015년 대일광업으로부터 받았던 40억원을 되돌려줘야 하는 것. 유족은 이 돈을 권진규의 초기 작품을 일본 등지에서 찾아 사들이고 권진규기념사업회 운영 등에 썼다. 권진규 작가의 조카인 허 대표는 "작품을 돌려받기 위해 자산 매각과 금융기관 대출 등으로 변제대금 30억원을 급히 마련했다"면서 "하지만 여전히 모자라는 금액(약 10억원)을 마련하기 위해 경매에 작품을 내놓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출품을 철회한 것은 "작품을 처분하지 않고 가능하면 해당 작품 모두가 온전히 공공미술관에 기증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는 "경매에 작품을 내놓고 이것이 정말 최선인가 하는 질문을 떨칠 수 없었다"면서 "작품을 처분하지 않고 718점 작품 모두를 기증해 공공의 자산으로 만들 방법은 없는지 다시 고민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이달 말까지 나머지 10억원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 최선을 다해 방법을 알아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말하자면. 유족은 작품을 '있는 그대로' 미술관에 기증하기 위해 빚을 낸 상황이다. 
 

비운의 작가 권진규 

작업실의 권진규. [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작업실의 권진규. [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권진규는 박수근·이중섭과 더불어 한국 근대미술의 3대 거장으로 꼽힌다. 1922년 함흥에서 태어나 춘천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무사시노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귀국 후 일본과 한국에서 작품을 발표하며 활동하다가 1973년 만 51세 나이에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석조, 테라코타, 건칠 등의 재료를 사용하며 작업했지만, 그가 가장 사랑한 재료는 테라코타였다. 흙의 질감과 색감에 매료된 그는 테라코타 작업에 몰두했고, 지인과 주변의 인물들을 모델로 수많은 초상과 자소상을 제작했다. 권진규가 빚은 인물 두상은 표정을 통해 초월적인 세계를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류지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은 "1960년대 서구 인체조각의 단조로운 모방과 변형에 머물던 한국 조각계가 그로 인해 비로소 구체적인 내용과 맥락을 지닌 조각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열 미술평론가는 "권진규는 한국을 넘어 20세기 중반 동북아시아 조소예술의 역사를 바꿔놓은 작가”라고 평가했다. 2009년 개교 80주년을 맞은 무사시노 미술대학은 권진규를 ‘가장 예술적으로 성공한 작가’로 선정하고 그 해 10월 권진규 회고전을 도쿄국립근대미술관과 무사시노 미술대학 미술자료박물관에서 열었다. 
 

미술계 "부끄럽고 안타깝다"

권진규의 1967년 작 '재회'. 나무, 테라코타. [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권진규의 1967년 작 '재회'. 나무, 테라코타. [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서울시립미술관은 유족으로부터 작품을 기증받으면 내년 상반기 남서울미술관에 상설 전시를 마련할 계획이다. 백지숙 서울시립미술관장은 "우리 미술관의 한 해 작품 구입 예산이 16억원이다. 한국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가의 대규모 컬렉션을 받으면서 기증 사례비도 드리지 못해 송구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최대한 전체 컬렉션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는 그는 "향후 작품에 대한 연구·전시가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미 서울시립미술관 기증 협의가 진행되고 있어서 뭐라 말하기 조심스럽다"면서 "분명한 것은 권진규 작품은 우리 민족의 자산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작품이 표류하고 있는 이 현실 자체가 한국 근현대 미술의 큰 비애"라고 말했다. 
 
한 미술 전문가는 "권진규 작품을 이 정도 규모로 모으는 것 자체가 만만치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금까지 컬렉션을 잘 지켜온 유족의 노력은 정말 대단한 것"이라며 "만약 일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공공기관에서 당연히 나서서 매입하지 않았겠냐"고 반문했다. 이어 "어쨌든 한국 문화계에서 이 일은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다. 기업이든 공공기관이든 나서서 컬렉션을 매입해 기증하는 방안이 추진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선 "일부 작품 팔고 기증해야" 

권진규, '춘엽니'(1967). 정진 중인 비구니 인물상을 재현한 작품으로 명상적인 종교적 색채가 진하게 녹아 있다. 개인소장. [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권진규, '춘엽니'(1967). 정진 중인 비구니 인물상을 재현한 작품으로 명상적인 종교적 색채가 진하게 녹아 있다. 개인소장. [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미술계에선 권진규 컬렉션이 흩어지지 않고 기증되기 위해서는 어느 독지가가 40억원에 컬렉션을 사들여 미술관에 기증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진다. 그러나 이는 실현 가능성이 작다는 지적이다. 조은정 미술평론가(2020 여수국제예술제 예술감독)는 "그 금액이 결코 적지 않고, 코로나19로 모두 어려운 현 상황에서 국내에 그만한 독지가가 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가 역시 "팔 수 있는 걸 단계적으로 먼저 팔고 후에 기증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라며 "안타깝지만 기증보다 우선 (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허 대표는 "모쪼록 권진규 이번에 돌려받는 작품과 기록물 700여 점이 한 점 흩어지지 않고 모두 공공미술관에서 보존, 전시되는 게 유일한 소망"이라고 했다. 그는 "2022년은 권진규 작가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때 권진규의 작품 세계를 심도 있게 조망하는 100주년 기념 전시가 차질 없이 이뤄지면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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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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