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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대통령이 그늘에 있으면 벌어지는 일들

중앙선데이 2020.12.05 00:30 714호 31면 지면보기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산나물 캐고 또 캐도/작은 바구니조차 채우지 못하네/아, 그이 생각 가슴에 사무쳐/바구니를 길에 던져놓고 말았네.”
 

지도자가 길 제시하지 않으면
삿된 무리들이 목소리 높인다
개혁 못하고 대선후보만 키워
모두 옳다 할 때 그릇됨 찾아야

불편한 마음을 추스르려 펼친 고전에서 눈에 들어온 『시경(詩經)』의 한 소절이다. 수자리 서러 변경에 간 낭군을 그리워하는 새댁의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머릿속에 온통 님 생각만 가득하다 보니, 나물은 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결국 바구니까지 잃고 온다는 내용이다.
 
사실 내가 편 고전은 『순자(筍子)』다. 그중 〈해폐(解蔽)〉편이다. 여기서 순자는 이 애절한 사랑 노래를 다른 뜻으로 사용한다. 무슨 일을 하는데 사심이 끼어든다면 나물 캐기처럼 쉬운 일조차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활자 위를 헤엄치던 시선이 다른 한 소절 위에서 멈춘다.
 
“어둠으로 밝음을 대신한다면/여우와 너구리만 창궐한다네.”
 
역시 『시경(詩經)』을 인용한 것인데, 좀 더 직설적이다. 임금이 음험한 그늘에 들어앉아 있으면, 신하들 역시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들로 채워진다는 비유다.
 
마음을 달래는 데는 실패했지만, 명쾌한 교훈을 얻었다. 역시 진리는 동서고금이 따로 놀지 않는다.
 
마음이 편치 않았던 건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칼럼을 써오면서 지금처럼 무력감을 느낀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야말로 황야에서 홀로 외치는 기분이었다. 과거 진보정권과 보수정권을 두루 비판할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아닌 척이라도 했고 듣는 시늉이라도 했다. 하지만 현 정권은 다르다. 아예 귀를 틀어막고 들으려 하질 않는다. 눈을 부릅뜨고도 보려 하지 않는다.
 
선데이칼럼 12/5

선데이칼럼 12/5

오만 탓인지 피해의식 탓인지 아니면 둘 모두가 이유인지 몰라도, 자기들과 생각이 다르면 모두 악(惡)이니 들을 필요가 없다는 태도다. 많은 국민(그들은 이들을 소수 적폐세력이라고 말한다)이 분노하고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데도, 목소리 큰 극렬 지지층(그들은 이들이 다수 국민이라고 생각한다)에 사로잡혀 대놓고 잘못을 저지른다. 그러면서 뭐가 잘못이냐며 삿대질을 한다.
 
부동산이나 탈원전 정책, 반기업적 경제 정책들은 문제는 많지만 그렇다 치자. 그걸 공약으로 내세워 집권한 정권이니 무능함이 드러났어도 무조건 못하게 막을 도리가 없다. 안타깝지만 그들에게 몰표를 던진 유권자들이 여권의 일방독주로 인한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검찰개혁은 다르다. 출범 초부터 입에 달고 살더니, 지금은 뭐가 개혁인지도 모르는 인지부조화의 진창에 빠졌다. 검찰개혁이 실천은 어렵지만 정의는 간단하다. 한마디로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다. 그런데 그걸 하겠다는 검찰총장을 몰아내는 게 정권의 지상과제가 돼버렸다. 장관서부터 여권 의원들까지 사생 결단을 하겠다고 달려든다. 그러면서 그걸 개혁이라고 우기는 거다.
 
왜 그러는지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검찰이 파헤치면 치명적일 수 있는 흠결이 숨어 있는 것이다. 원전, 울산시장 선거, 라임 옵티머스 비리 등 일각을 드러낸 의혹만도 한둘이 아니다. 그러니 절반을 훌쩍 넘는 민심과 거의 모든 검사의 반대, 법원과 법무부 감찰위원회의 잇단 제동도 무릅쓰고 검찰총장을 쫓아내고 말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검찰총장만 찍어낸다고 될 일이 아닌데도 그런다.
 
이렇게 다른 마음이 끼어드니 원래 목표였던 개혁은 물 건너 가버리고, 애먼 검찰총장이 대선후보 1위로 올라서는 촌극이 빚어진다. 그야말로 나물도 못 캐고 바구니만 잃는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제 두 번째 시구가 가리키는 지혜는 쉽게 추론이 가능하다. 이 정권이 그토록 많은 궤변과 오기, 무리수들이 판을 치는 것은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이 그늘에서 나오지 않는 까닭이다. 최고지도자가 명확한 길을 제시하지 않으니, 생각이 곧은 사람들보다 사(詐일 수도 있고 私일 수도 있다)가 낀 사람들이 앞에 나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취임 초기 대통령의 개혁 의지를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가 끼어드는 걸 경계하지 못했다. 내게, 우리에게 좋은 건 다 하면서 개혁을 할 수는 없다. 그러니 나물도 못 캐고 바구니까지 잃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임기 전반 내내 외쳤던 적폐 청산을 실패한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다. 적폐 청산의 가장 쉬운 방법은 적폐라 생각되는 걸 나부터 하지 않으면 된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해폐〉편은 순자의 인식론이 펼쳐지는, 『순자』 중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여기서 순자는 결론처럼 말한다.
 
“세상에는 두 가지 일이 있다. 모두 그르다 할 때 옳은 게 없는지 살피고, 모두 옳다 할 때 그른 게 없는지 살펴야 한다(天下有二 非察是 是察非).”
 
나만 옳다는 독선과, 우리만 옳다는 만용 앞에 세상은 필연적으로 파멸의 길을 예비하고 있다. 끝이 낭떠러지인 그 길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외길이다. 운이 좋으면 조금 늦게 추락할 따름이다. 이 나라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비극이 여실히 증명하고 있지 않나 말이다. 이 말도 들으려 하지 않기 쉽겠지만, 지금이라도 ‘비찰시 시찰비’의 지혜를 되새겨주길 바랄 뿐이다. 내게서, 우리에게서 그름을 발견해 바로잡는 것이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이다. 그것이 국민을 평안하게 해주는 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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