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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2035] 잘 보면 좋다, 못 봐도 괜찮다

중앙일보 2020.11.30 00:19 종합 28면 지면보기
이태윤 복지행정팀 기자

이태윤 복지행정팀 기자

대학수학능력평가 시험을 본 지 10년도 넘게 지났지만 그날의 기억은 남아있다. 수능 당일, 평소와 똑같이 행동해야 긴장을 덜 할 수 있다고 해서 일부러 교복을 입고 갔더랬다. 그 촌스러운 교복을 입고도 한 점 부끄러움 없었다. 인생 망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수능 한 달 전부터는 국어, 수학, 영어, 사회탐구 순서대로 매일 모의고사를 풀었다. ‘생체리듬’을 맞춘다는 이유에서다. 지금도 생체리듬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랬다. 모의고사 때도 점심은 안 먹었다. 대신 초코 우유만 하나 마셨다. ‘영어 듣기 평가를 할 때 졸릴까 봐’ 같은 이유는 아니고 그냥 성격이 안 좋아서 시험 날은 뭘 먹어도 소화하지 못했다. 엄마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겨준 수능 도시락은 그대로 남겨 두고 수능 날도 초코 우유 한 팩만 마셨다. 생체리듬을 맞추고 교복을 입고 초코우유를 마셨는데 수능 성적은 마지막 모의고사보다 20점 정도 떨어졌다. 집에 오자마자 가채점을 한 뒤 부모님이 듣든 말든 방에서 큰소리로 욕을 했다. 꽤나 개념 없는 행동이지만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내 인생은 망했고 그런 자식에게 뭐라고 할 부모는 없을 테니 말이다.
 
수능이 큰 기회인 건 맞지만 마지막 기회인 건 아니다. [중앙포토]

수능이 큰 기회인 건 맞지만 마지막 기회인 건 아니다. [중앙포토]

수능이 끝난 날, 기분을 풀기 위해 친구 집에 모여 밤새워 놀다가 펑펑 울었다. 30년이 넘도록 살았지만 친구 앞에서 꺼이꺼이 운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창피하지 않았다. 인생이 망한 친구에게 뭐라고 하면 친구가 아니니까 말이다.
 
수능을 본 뒤 10년이 넘게 지났다. 당연하게도 내 인생은 망하지 않았다. 직장도 구했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망하지 않고 돌아본 그날의 기억은 흑역사 천지다. 친구들은 지금도 그 날 운 걸 가지고 날 놀린다.
 
수능이 큰 기회인 건 맞지만 마지막 기회인 건 아니다. 내가 현역으로 대학에 갔을 때 삼수를 했던 친구는 나보다 일찍 취직했다. 대학등급표 기준 내 모교보다 낮은 곳을 졸업한 친구의 연봉은 나보다 1000만원 넘게 많다. 물리학과를 나온 친구는 혼자 코딩을 독학해 두 번의 이직 끝에 굴지의 IT 회사에 다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누구보다 스트레스 받았을 수험생이다. 가림막을 두고 문제 푸는 것도, 학교에 제대로 못 간 것도 모두 짜증스러울 테다. 남은 며칠 마음이나마 편하길 바란다. 수능을 망친 채로 19살을 지나 20살이 돼도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다. 코로나19가 와도 굳건한 지구다. 대학 좀 잘 간다고 탄탄대로가 보장되는 시대도 아니다. 수능 시험 시간에는 막 비행기도 멈추고 경찰차로 데려다주고 그러니 일생일대의 기회 같이 생각할 수 있지만, 다른 기회가 분명히 있다. 그러니까 이 사실만 알았으면 좋겠다. 잘 보면 좋다. 근데 못 봐도 괜찮다.
 
이태윤 복지행정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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