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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쭤린 “마적 출신 군관 민폐 극심” 왕융장에게 개혁 특명

중앙선데이 2020.11.28 00:21 713호 29면 지면보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3〉

동북대학교 개교식에 참석한 왕융장(앞줄 오른쪽 다섯째). 오른쪽 넷째는 장쉐량(張學良). 교장은 왕융장이 겸했다. 1923년 4월 26일, 펑톈(지금의 선양). [사진 김명호]

동북대학교 개교식에 참석한 왕융장(앞줄 오른쪽 다섯째). 오른쪽 넷째는 장쉐량(張學良). 교장은 왕융장이 겸했다. 1923년 4월 26일, 펑톈(지금의 선양). [사진 김명호]

청(淸)나라 말기, 다롄(大連)교외 진저우(金州)에 왕커쳰(王克謙·왕극겸)이라는 회계원이 있었다. 지주들 장부정리 해주며 양식 걱정은 안 했다. 부자들도 왕을 회계쟁이라며 막 대하지 않았다. 거드름 피우는 부잣집 부인네들은 더했다. 허드렛일 다니는 왕의 부인만 보면 기가 죽었다. 이유가 있었다. 아들 융장(永江·영강)과 융차오(永潮·영조)가 17세 때 지방고시에 합격한 수재(秀才)였다. “서진(西晉)의 소년천재 육기(陸機)와 육운(陸雲)을 능가한다”는 소문이 다롄까지 자자할 정도였다.
 

17세에 고시 합격한 수재 왕융장
경찰국장 이어 재정청장에 임명

광산개발·무역으로 ‘곳간’ 넘치자
장쭤린, 동 3성 독립 선포하고
군수공장 설립, 4년제 대학 세워

진저우의 거상이 왕씨 형제라면 사족을 못 썼다. 금쪽같은 두 딸을 형제에게 출가시켰다. 사돈 왕커쳰에게도 잡화점을 차려줬다. 융차오는 성미가 불같았다. 기다리던 관직 발령이 수포가 되자 관청에 불 지르고 자살했다. 융장은 뇌물의 중요성을 모르던 동생의 죽음에 충격이 컸다. 관직에 나가기를 포기하고 의학연구에 몰두했다.
  
왕융장, 부패 경찰 추려내 공개 처형
 
장쭤린 통치 시절의 펑톈교외. [사진 김명호]

장쭤린 통치 시절의 펑톈교외. [사진 김명호]

동3성 총독 자오얼쉰(趙爾巽·조이손)은 귀가 열린 사람이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왕융장에게 펑텐(奉天) 민정국을 맡기고 싶다며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의 의견을 구했다. 장쭤린이 반대하자 직접 찾아가라며 왕융장을 달랬다. 혁명세력을 진압하고 자오얼쉰의 목숨을 구한 장쭤린의 관저는 문전성시였다. 왕융장은 1시간을 기다렸지만 장쭤린을 만나지 못했다. 영웅의 오만을 질책하는 풍자시 한 편 남기고 등을 돌렸다. 시를 받아본 장쭤린은 화를 내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왕융장은 약방을 차렸다. 당시 진저우의 약방은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왕융장은 파산했다. 의서(醫書) 집필로 시간을 보냈다. 장모는 전형적인 동북 여자였다. 허구한 날 개떡 같은 사위들 골라왔다며 남편의 멱살을 잡았다. 장인은 할 말이 없었다. 왕융장을 데리고 가출했다. 독서에나 열중하라며 펑톈 교외에 오두막집을 구해줬다.
 
1915년 10월 15일, 장쭤린은 대총통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가 동3성에 파견한 진안상장군(鎭安上將軍) 돤즈꾸이(段芝貴·단지귀)의 대표 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했다. 6일간 머무르며 경복궁에서 열린 물산공진회를 참관하고, 조선총독 데라우치와 두 차례 회담했다. 적극적인 친일을 표방해 환심을 샀다. 이듬해 6월, 2개월 전 장쭤린을 펑톈성독군 겸 성장에 임명한 위안스카이가 세상을 떠났다. 10월에는 조선에서 좋은 인상 남긴 데라우치가 총리로 도쿄에 부임했다.
 
동북공병창 건립 전 장쭤린이 독일에서 수입한 박격포. [사진 김명호]

동북공병창 건립 전 장쭤린이 독일에서 수입한 박격포. [사진 김명호]

신분이 상승한 장쭤린은 측근들에게 인재 추천을 당부했다. 막료 한 사람이 왕융장을 천거하자 박장대소(拍掌大笑)를 그치지 않았다. “누군지 안다. 내가 작은 관직에 만족해 우쭐댈 때 시 한 편으로 나를 질책한 사람이다. 직접 영접하겠다.” 왕융장을 만난 장쭤린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나는 마적으로 입신한 반문맹(半文盲)이다. 제도가 뭔지 모른다. 군관들도 거의 마적 출신이다. 민폐가 극심하다. 경찰복 입혀놔도 마적 근성을 버리지 못한다. 음식점 가서 공짜 밥 먹고, 대낮에 술주정하며 부녀자를 희롱한다. 간부란 놈들도 사창가에서 뜯은 돈으로 도박장에서 밤을 지새운다. 삼류 마적이나 도둑놈보다 더 흉악한 놈들이 부지기수다. 경찰개혁을 부탁한다. 나와 의논할 필요 없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경찰 개혁이 끝나면 교육사업에 매진하고 싶다. 나는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자식 교육도 아들은 몽둥이로 했다. 딸들은 남자 구경 못 하도록 외부출입만 엄격히 금지했다. 실력 없는 엉터리 교사들을 강단에서 끌어내라. 지금 동3성은 어딜 가나 일본인들이 널려있다. 일본을 적당히 이용하고, 이용당할 생각이다. 일본에 배울 것은 배우되 농락당하지는 마라. 여기 권총과 실탄이 있다. 필요할 때 써라. 시간이 없다. 서둘러라. 소리만 요란하고 질질 끌면 실패한다.”
 
경찰청장 왕융장은 부패 경찰 18명을 추려냈다. 공개 처형하고 시신을 3일간 폭시(暴屍)했다. 군기가 바짝 든 경찰들이 도박장과 아편굴을 급습했다. 군관이건 사회 명사건 무조건 체포했다. 무장군인들이 동료를 석방하라며 경찰청으로 몰려왔다.  
  
장쭤린 “일본 배우되, 농락 당하진 마라”
 
1915년 12월, 위안스카이가 칭제(稱帝)할 때 보낸 중화제국 자작(子爵) 복장을 착용한 장쭤린.

1915년 12월, 위안스카이가 칭제(稱帝)할 때 보낸 중화제국 자작(子爵) 복장을 착용한 장쭤린.

펑톈 주둔군 지휘관 탕위린(湯玉麟·탕옥린)은 장쭤린의 결의 형제 중 한 명이었다. 왕융장의 멱살 잡고 모자까지 집어 던졌다. 밖에서는 경찰과 군인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경찰 2명이 목숨을 잃었다. 탕위린은 장쭤린에게 항의했다. 장쭤린이 딴청을 부리자 펑톈을 떠나겠다며 차고 있던 권총 두 정을 패대기쳤다. 잠시 쉬고 돌아오라는 장쭤린의 말을 뒤로했다.
 
장쭤린이 보기에 왕융장은 경찰 재목은 아니었다. 차분하고 민첩한 사람이 무장한 경찰을 지휘하다 보니 마적보다 더 거칠었다. 경찰복 오래 입었다간 사람 버리겠다며 재정청장을 맡겼다. 왕융장은 장쭤린의 돈 보따리였다. 광산개발과 무역으로 2년 만에 펑톈성의 채무를 상환하고도 남았다. 장쭤린은 곳간이 채워지자 하늘을 넘봤다. 1922년, 동3성의 독립을 선포했다. 4년제 대학과 군수공장 설립을 위해 왕융장을 펑톈성 성장에 임명했다.  
 
“오사카에 있는 군수공장에 버금가는 병기공장을 만들자. 외국 기술자들을 동북으로 초빙해라. 인재양성 없이 군사력만 증강하면 폭력집단으로 전락한다. 4년제 대학을 설립하고 우수한 교수들을 모셔와라. 동북은 독일과 프랑스를 합친 것보다 넓다고 들었다. 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다. 이민을 권장하자. 여비와 주거지 부담할 테니 누구나 와서 살라고 해라.”  
 
왕융장은 귀가 번쩍했다. 1차 세계대전에 패한 독일에는 실업자로 전락한 병기 기술자들이 거리에 널려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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