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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고급주택…서민주택 대명사로 둔갑 ‘빌거’라 멸시

중앙선데이 2020.11.28 00:02 713호 2면 지면보기

‘의문의 1패’ 빌라

요즘 전세 물건 품귀 현상이 일면서 임차인들이 차선책으로 빌라 매수에 나서고 있다. 사진은 서울 송파구 빌라 밀집 지역. [연합뉴스]

요즘 전세 물건 품귀 현상이 일면서 임차인들이 차선책으로 빌라 매수에 나서고 있다. 사진은 서울 송파구 빌라 밀집 지역. [연합뉴스]

‘아파트에 살 능력이 없으면 빌라에 살면 된다’. 정부의 11·19 대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아니다 다를까 전세대책 발표 직후 여당의 미래주거추진단장은 “아파트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자신은 어쩌다 새 아파트에 살게 됐지만 빌라도 품질이나 구조가 나쁘지 않으니 살 만하다는, 미래주거추진단장다운 설명이었다. 바꿔 말하면 서민은 아파트에 살 생각 말고 빌라에 살라는 얘기다. 근대화 이후 꿋꿋이 국민의 보금자리 역할을 해왔던 빌라가, 느닷없이 정부와 여당으로부터 한 대 얻어맞은 셈이다. 시쳇말로 ‘의문의 1패’를 당한 것이다.
 

4층 이하 다세대·연립주택 통칭
재개발 등 여파 비중 30%로 줄어

서울 59㎡형 쓰리룸 2억~8억선
최근 전셋값 뛰자 몸값 상승세

신축은 주차·소음·보안 등 개선
실수요 아니면 신중히 접근해야

빌라는 한때 전체 주택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보편화한 주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빌거(빌라에 사는 거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온갖 멸시를 받고 있다. 여당 미래주거추진단장의 조언에도 빌라에 대한 괄시가 담겨 있다. 국민 대다수가 살 곳은 ‘빌라’인데 아파트에 대한 ‘환상’에 젖어 있으니 아파트값이 급등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대세’였던 빌라는 어쩌다 이런 취급을 받게 된 걸까.
 
“이참에 빌라라도 …” 패닉바잉으로 번져
 
사실 우리나라엔 관련법상 빌라라는 주택은 없다. 빌라는 건축법상 공동주택의 한 종류인 다세대주택과 연립주택을 통칭하는, 주택시장에서 편의상 쓰는 말이다. 다세대·연립주택은 4층 이하(1층이 주차장이면 층수에서 제외) 저층 주택이다. 언제부턴가 다세대·연립주택에 ‘○○빌라’ ‘○○빌’이라는 이름을 붙으면서 빌라가 자연스레 ‘저층 주택’의 대명사가 됐다. 원래 빌라(villa)는 유럽에서 산이나 호숫가에 지은 별장 등을 이르는 고급 주택인데, 다세대·연립주택을 분양하면서 ‘고급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가져다 쓴 것이 그대로 굳어 버린 것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주택시장에선 다세대·연립주택 외에 단독주택의 한 종류이자 외관상 다세대주택과 똑같은 다가구주택(주택으로 쓰는 층이 3층 이하)도 빌라라고 부른다. 현장의 부동산중개업소들은 “주택 수요자 대부분은 주택 종류를 아파트와 빌라, 단독주택 정도로만 구분한다”며 “마당이 있는 1~2층짜리 집은 단독주택이고 나머지는 그냥 다 빌라”라고 전했다.
 
고급 주택을 이르는 명칭이 국내에 들어와 서민주택의 대명사가 됐지만, 국내에서도 모두 서민주택만 있었던 건 아니다. 서울 방배·한남·청담동 등지엔 대형 고급 빌라가 많고, 이들 빌라는 주변 아파트보다 훨씬 비싸다. 아파트가 확산하기 전까지 빌라는 주택시장의 대세이기도 했다. 주택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60% 정도였다. 하지만 서울에선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본격화하면서 그 비중이 30% 정도(2019년 말 기준)로 확 쪼그라들었다. 낡은 빌라를 아파트로 재개발·재건축한 영향이다. 수도권은 빌라 비중이 현재 22% 정도인데, 서울과는 달리 신도시 영향이 크다. 일산·판교 등 수도권에 신도시를 대거 개발하면서 아파트 위주로 공급해 상대적으로 빌라 비중이 줄었다.
 
비중만 준 게 아니다. 아파트가 계속 발전하면서 빌라는 점점 서민주택으로 굳어져 갔다. 아파트처럼 수백·수천여 가구가 모여 단지를 이루기 힘들고, 저층이어서 겪어야 하는 불편이 적지 않다. 서울 강남의 한 빌라에 거주 중인 심모(41)씨는 “아파트와 달리 크고 작은 도로와 접해 있다 보니 낮이고 밤이고 배달 오토바이 소음 때문에 창문을 열 수가 없다”며 “주차장도 협소해 이웃 간 얼굴을 붉히기도 한다”고 전했다. 어린 자녀가 있거나 계획 중인 신혼부부가 빌라를 기피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대기업이 짓는 아파트와 달리 개인이나 중소 업체가 지어 공급하다 보니 아파트에 비해 품질도 떨어지는 편이다. 관련법상 공동주택관리 의무대상이 아니어서 대부분 관리실도 없다. 보안이나 쓰레기 분리수거 등 전반적으로 관리가 허술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때문에 빌라는 아파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편이다. 지역에 따라, 또 지은 지 얼마나 됐느냐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지만 대개 인근 아파트 전셋값보다 싼 편이다. 실제 강남구 대치4동의 한 ‘쓰리룸’(방 3개+거실) 빌라는 7~8억원 선에 매물이 나오는데, 길 건너 역삼e편한세상 아파트 전용면적 59㎡형 전셋값은 11억5000만원 선이다. 빌라는 아파트와 달리 ‘투룸’(방 2개+거실), 쓰리룸 등으로 구분하는데 쓰리룸은 최신 아파트로 치면 전용면적 59㎡형쯤 된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다 보니 다락같이 오른 전셋값에 치인 무주택자들이 요즘 빌라에 몰리고 있다.
 
서울 강남엔 아직 고급 빌라 많아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9월 빌라 거래량은 4487건으로 아파트 거래량(3769건)보다 많았다. 10월에도 300건 앞섰고, 이달 들어서도 25일까지 160건 앞서고 있다. 빌라 거래량이 아파트 거래량을 앞선 건 8년여 만이다. 서울에선 2억~8억원 정도에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다 보니 이참에 빌라라도 사야겠다는 심리가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함영진 직방 데이터랩장은 “서울에 살아야 하지만 자금 여력이 부족한 주택 수요자들이 대안으로 빌라를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빌라로까지 패닉바잉(공포 매수)이 번지고 있는 것이다. 거래가 늘면서 몸값도 상승세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올 1월 99.9던 다세대·연립주택의 매매가격지수는 지난달 100.7로 상승했다.
 
전셋값이 계속 뛸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전문가들은 당분간 이 같은 추세가 이어질 것으로 내다본다. 빌라를 아파트 전세의 대안으로 고려한다면 지은 지 오래된 구축보다는 신축이 낫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요즘 짓는 빌라는 기본적으로 엘리베이터를 갖추고 있고, 건축 자재·기술 발달로 층간소음 문제 등이 구축보단 덜하기 때문이다. 보안이나 주차장이 잘 갖춰진 빌라도 꽤 있다. 꼭대기층 일부는 테라스(아랫집 지붕을 마당처럼 쓰는 구조)가 있거나 복층 구조여서 아파트보다 공간 활용성이 좋은 예도 있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은 “빌라는 그러나 기본적으로 단지를 이루기 힘들고 저층인 만큼 실수요가 아니면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빌라 건물

빌라 건물

빌라, 환금성 떨어져 무리한 대출 땐 ‘하우스푸어’ 될 수도
서울·수도권 주택가를 거닐다 보면 신축 빌라 분양 플래카드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거기서 유독 주택 수요자의 눈길을 끄는 문구가 있다. ‘실입주금 1억원’ 또는 ‘실입주금 1000만원’ 등이다.  
 
정부의 대출 규제로 요즘 서울엔 이런 플래카드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수도권 외곽 지역에선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굳이 해석하자면, 1억원만 혹은 1000만원 있으면 당장 신축 빌라를 분양 받아 입주까지 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런저런 이유로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하지 못해 이사를 가야 하는 임차인 입장에선 눈길이 갈 만한 문구다. 실제로 비교적 소액으로 빌라를 마련하는 게 가능한 걸까.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빌라는 대부분 집을 거의 다 짓거나 완공한 상태에서 분양을 하는 예가 많은데, 이때 분양 계약서상 분양가를 실제보다 20~30% 부풀려 작성한 뒤 금융권에서 담보대출을 한도까지 받는 것이다. 대출 한도가 분양가의 60%라고 가정하면 계약자는 실제 분양가의 10~20% 이내에서 분양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지금은 정부의 대출 규제로 담보대출 한도가 많이 줄어 수도권 외곽이라도 수천만원은 있어야 계약할 수 있지만, 불과 2~3년 전에만 해도 실입주금이 ‘0원’인 곳도 수두룩했다. 한 빌라 분양업체 관계자는 “서울과 같은 규제지역에선 대출이 많이 나와야 집값의 50% 정도여서 지금은 실입주금이 적지 않게 든다”며 “하지만 2~3년 전 수도권 외곽에선 실입주금이 0원~1000만원인 곳이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장 수중에 집 살 돈이 없어도 신축 빌라를 분양 받아 입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집이 없는 서민에겐 반가운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대출을 너무 많이 받으면 ‘하우스푸어’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당장 은행 대출금리가 상승세로 돌아서면 대출 이자를 감당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특히 빌라는 가격이 잘 오르지 않고, 되팔기가 쉽지 않아 대출을 무리하게 받으면 고스란히 부담이 돼 돌아올 수밖에 없다.  
 
한 분양대행업체 관계자는 “빌라는 환금성이 떨어져 원하는 시기, 원하는 가격에 팔기 어려운 만큼 대출을 받을 때는 금리 인상 등을 고려해 적정한 수준에서 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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