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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현장에 묻다] 중학 중퇴 가출소년은 어떻게 수백억 외식업체 일궜나

중앙일보 2020.11.27 00:35 종합 26면 지면보기

스쿨푸드 운영하는 SF이노베이션 이상윤 창업주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돈이 주는 안락함이 없다면 최전선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어려운 상황에 대처할 거라곤 사랑, 유머, 낙천주의밖에 없을 때도 있다.”
 

부모 이혼 후 고아처럼 방치돼
15세에 이태원 밤무대 춤꾼 생활
가수 꿈 좌절 뒤 김밥 장사 ‘대박’
“세상 탓은 핑계, 성공 사다리 작동”

나이 마흔넷에, 그것도 30번 넘게 퇴짜를 맞은 끝에 생애 처음으로 내놓은 소설 『셔기 베인(Shuggie Bain)』으로 올해 부커상(세계 3대 문학상)을 거머쥔 더글러스 스튜어트가 최근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알코올중독 어머니 아래서 궁핍하게 자란 소년이 이뤄낸 놀라운 성취의 원동력이 이 한 문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스쿨푸드’ ‘김작가의 이중생활’ 등으로 유명한 외식업체 SF이노베이션 이상윤 CVO(52·최고비전책임자)의 삶도 이 문장에 그대로 겹쳐진다. 국민학교(※그는 국민학교 세대다) 4학년 때 부모 이혼을 계기로 그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어머니는 돌연 사라지고, 아버지는 돈 벌러 중동 가고, 차압 딱지 붙은 집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매 끼니 배 채울 걱정을 해야 하는 고단한 삶의 시작이었다. 찌개 하나 끊이면 둘이 며칠을 먹었다. 국민학생 때 밥상머리 예절 대신 담배부터 배우고(※창업 후 30대가 돼서야 끊었다), ‘삥’ 뜯다가 자퇴해 중학교 졸업장도 없다. 아마 누구라도 이 시절 이 CVO를 본다면, 아니 이런 삶의 궤적만 놓고 평가한다면 “출발하기도 전에 실패가 예정된 인생”이라고 고개를 가로젓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사랑, 유머, 낙천주의, 그리고 특유의 호기심으로 연 매출 500억원(국내 직영점 기준)에 해외 진출까지 한 번듯한 외식업계 사업가로 성공했다. 잠시 모델 생활을 했던 13살 어린 아내와의 사이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 7살에서 14살까지 4남매를 둔 다복한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하다. 코로나19 이후 정부의 오락가락 방역 대책으로 벼랑 끝에 몰린 자영업자들이 좌절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요즘, 절망이 아닌 희망을 얘기하려고 서울 역삼동 SF이노베이션 본사에서 이 CVO를 만났다. 2002년 창업 이후 달려온 성공 가도보다 어린 시절 얘기가 우선 궁금했다.
 
서울 역삼동 SF이노베이션 본사에서 이상윤 CVO를 만났다. ‘당신의 입속에 꿈을 담아드립니다’라는 글귀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가 지은 문장이다. 최정동 기자

서울 역삼동 SF이노베이션 본사에서 이상윤 CVO를 만났다. ‘당신의 입속에 꿈을 담아드립니다’라는 글귀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가 지은 문장이다. 최정동 기자

얼마나 어렵게 살았나.
“부모 이혼 후 고아나 마찬가지였다. 5살 많은 형은 일찌감치 집을 나갔다. 아버지가 돈 벌러 사우디 간 후엔 할머니와 둘이 살았다. 아니, 살았다기보다 밖으로 나돌았다. 숙소 제공해준다길래 새벽 신문을 돌리기도 했고, 박스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서울역에서 노숙도 했다. 한번은 서울역에서 자고 있는데 누가 밥 먹여준다길래 따라갔더니 인력시장에 사람 넘기고 소개비 챙기는 일당이었다. 외국인 노동자가 없던 시절이라 우리 같은 애들을 데려다 썼다. 다행인지 아폴로눈병 걸려 눈이 시뻘게서 아무도 나를 안 썼다. 그렇게 며칠 지내다가 ‘사람 살려’ 하고 도망쳐 나왔다.”
 
공부는 아예 손을 놓았나.
“지금 생각하면 참 슬프다. 중동중학교에 배정받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그냥 다니기만 했다. 버스 탈 돈이 없어서 미아리 집에서 광화문(※당시엔 광화문에 있었다)까지 2시간 넘게 걸어서 통학하다 보니 자주 지각했다. 그럼 선생님한테 맞고. 삶이 짜증스럽기만 했다. 자연스레 나쁜 짓에 손을 댔고, 이게 문제가 돼 자퇴하게 됐다.”
 
용케 더 나쁜 길로 안 빠졌다.
“삥 뜯는 게 적성에 안 맞았다. 하하. 사실 웬만한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그런 걸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댄스 크루로 활동하던 스무 살 무렵의 이상윤 CVO. [사진 이상윤]

댄스 크루로 활동하던 스무 살 무렵의 이상윤 CVO. [사진 이상윤]

학교 나와 뭘 했나.
“형이 자기가 서빙하는 곳에서 같이 일하자고 이태원에 데려갔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중3 때다. 밤업소에서 코믹하게 춤추면서 각설이 공연하던 형을 알게 됐는데 ‘돈 많이 번다’는 말에 ‘나도 하겠다’고 나섰다.”
 
미성년자가 밤 무대에 어떻게 섰나.
“그땐 회비 몇만 원만 내면 국가가 발급해주는 공연증으로 미성년자도 공연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인순이 등 유명 가수가 나오는 다빈치 나이트에서 춤을 췄다. 쇼 무대에 설 땐 벌이가 짭짤했다. 버는 것만큼이나 쓰는 기술도 중요한데 배운 게 없으니 버는 족족 다 써버렸다. 당시 나처럼 댄스 크루로 활동하던 박남정·현진영 등이 가수로 데뷔하는 걸 보고 가수가 되려고 했다. 한 작곡가 집에서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 앨범을 안 내주길래 직접 곡의 가사를 써서 1997년 데뷔를 하기는 했다. 잘 안 되기도 한 데다 결핵까지 걸려 결국 가수의 꿈은 포기하고 연예기획사에 들어가 신인 가수들 춤 짜주고 가사 써주는 월급쟁이 기획자 생활을 했다.”
 
사업은 어떻게 시작했나.
“아내와 연애하던 때인데 안정적인 밥벌이가 필요했다. 2002년 서울 논현동 반지하 단칸방에서 형이랑 김밥 장사를 시작했다. 그땐 몰랐는데 ‘화류계’ 생활이 도움됐던 거 같다. 춤을 짜고 가사를 썼을 때의 심정처럼 내가 만든 브랜드에 대한 공감을 얻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 시절만 해도 외식 브랜드를 대표하는 독특한 슬로건이나 스토리가 없었다. 광고 전단 메뉴 뒷면에 내 스토리를 적은 것은 물론 메뉴마다 왜 이 메뉴를 만들었는지 스토리를 썼는데, 이게 먹혔다. 신선하게 다가갔는지 응원 전화가 쏟아지며 주문이 폭주했다.”
 
‘당신의 입속에 꿈을 담아 드립니다’ ‘낮보단 밤에 더 보고 싶어’처럼 훗날 유명세를 떨친 감각적인 매장 슬로건이나 독특한 네이밍의 메뉴도 다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31살에 지금의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이상윤]

31살에 지금의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이상윤]

가로수길 스쿨푸드 매장이 화제였다.
“떡볶이 같은 걸 파는데 고급스런 도자기에 담고 트렌디한 음악에, 매장 곳곳엔 디스플레이를 설치해 마돈나 실황 공연 영상을 틀고. 전에 못 보던 이상한 식당에 사람들이 열광했다. 당시 가로수길엔 트렌드에 민감한 광고기획사와 디자인회사가 많았다. 입소문이 나면서 김태희 등 탑 연예인이 기다려서 음식 주문해가는 핫한 식당이 됐다.”
 
외국 매장을 참고한 건가.
“아니다. 뭘 배운 게 있어야 베끼기라도 하는데 아예 본 게 없으니 완전히 새롭게 할 수 있었다. 당시 스쿨푸드 매장 건물주가 건너편에서 카페를 했다. 거기에 건물주가 앉아있길래 손님인 척하고 ‘저 앞 스쿨푸드 장사 잘되느냐’고 물었다. 그 건물주 왈, ‘영국 유학 갔다 온 있는 집 애들 셋이 아주 새롭고 감각적으로 만들어서 잘 된다’더라. 엉터리 답변이었지만 기분 좋았다. 실제로 금강기획 같은 유명 광고기획사에서 마케팅 강의해달라는 요청이 오고 대기업 임원들이 줄줄이 만나서 ‘어떻게 이런 전략을 생각했느냐’고 물었다. 전략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하고 싶은 것 했을 뿐인데.”
 
몇 년 전 상장과 지분 매각을 추진했다.
“4년 전쯤 일이 즐겁지만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큰 수술 받고 몸이 지치기도 했고. 마침 일정 규모 이상으로 성장하면 그에 걸맞은 시스템이 작동해야 한다는 조언을 많이 들었다. 내가 모르니 영입해서 잘해보겠다는 마음으로 학벌 좋은 경영진을 영입했다. 변화하고 발전해서 상장까지 가보자는 욕심이 있었다. 3년 만에 깨달았다. 내가 쏟아온 열정과 노력을 다른 사람이 똑같이 해주길 기대해선 안 된다는 걸. 서빙부터 커온 기존 직원들과 갈등만 빚다 전부 나갔다. 사람에 실망했지만 결국 사람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알바 출신에게 대표를 맡긴 이유인가.
“그렇다. 믿어준 만큼 일을 해낸 젊은 친구들에게 비전을 줘야 하지 않나. 나는 공부를 더 하면서 바뀐 세상에 맞춰 미래를 준비하며 더 큰 도전을 해야 한다.”
 
지난해 11월 스쿨푸드 매장 서빙과 배달 알바부터 시작한 이양열(34) 대표가 CEO가 됐다. 이 CVO는 최근 확장하고 있는 스쿨푸드 딜리버리를 통해 쌓이는 데이터를 활용해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방법 등 새로운 구상을 하고 있다.
 
졸업장에 대한 갈증은 없나.
“졸업장보다 왜 스쿨푸드가 배민(배달의민족) 같은 배달플랫폼을 먼저 못 만들었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공부 안 한 게 아쉽다. 전문경영인과 껄끄러웠을 때도 ‘내가 고등학교라도 나왔다면 이런 식으로 일을 맡기지 않고 더 지혜롭게 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누굴 만나도 나보다 위라고 생각했기에 뭔가 배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본인이 올라온 성공 사다리가 여전히 작동한다고 보나.
“성공 사다리가 끊어졌다는 말에 동의 안 한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세상 탓은 핑계다. 방법을 찾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말 하면 꼰대 소리 듣는 거 안다. 그렇게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나와 같은 이야기를 할 거다. 지금 내 모습은 생각의 결과다. 생각했는데 안 되더라고? 그건 노력 없이 생각만 한 거다.”
 
마지막으로 성공의 원동력을 뭐로 꼽나.
“낙천성. 그리고 호기심.”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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