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영주시 순흥면의 청다리. 소수서원과 선비촌을 잇는 이 다리에서 '다리에서 주워온 아이'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불행히도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현재 이 다리는 2004년 새로 지은 것이다.
“넌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
어렸을 적 엄마의 농담에 안 울어본 아이가 없었을 테다. 왜 세상의 엄마는 하나같이 제 아이를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며 놀렸을까. 그 문화적 원형 나아가 역사적 맥락은 무엇일까. 있기는 할까.
놀랍게도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그 현장이 있다. 아기를 주워 와 키운 다리. 소백산에서 발원한 죽계천이 소수서원과 선비촌 사이를 흐르는데, 이 사이에 놓인 청다리가 바로 전설의 진원지다. 순흥에는 실제로 청다리 밑에서 아이를 주워 와 키웠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순흥 청다리가 팔도의 온갖 다리로 확산했다는 얘기인데, 여행작가 이종원(54)씨는 순흥 청다리를 “전 국민의 심정적 고향”이라고 농 삼아 이른다.
단종 애사 외전

금성대군 신단. 순흥에서는 여전히 이 신단에서 제사를 지낸다. 봄 가을에 한 번씩 1년에 두 차례 지낸다.
모의에 가담한 사람만 죽은 게 아니었다. 애먼 순흥 사람 수백 명이 청다리 아래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순흥 30리 안에는 사람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으며, 청다리 아래의 피가 죽계천을 따라 10리 밖 마을까지 흘렀다고 한다. 피가 비로소 멈춘 마을, 안정면 동촌 1리는 아직도 ‘피끝마을’이라고 불린다. 1457년의 참상을 역사는 정축지변(세조 3년)이라 이른다. 영주시가 그 뒷이야기를 기록했다.

영주 소수박물관에 있는 제월교비. 퇴계 이황이 다리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제월교는 ‘제월광풍(霽月光風)’에서 비롯된 말이다. ‘장맛비가 멎은 뒤 맑은 하늘 같은 기운’이라는 뜻으로 훗날 명예를 되찾는다는 의미가 더해진다. 풍기 군수로 부임했던 퇴계 이황(1501~70)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지금 다리 옆에 서 있는 비는 재현품이고, 숙종 36년(1710) 다시 세운 비가 영주 소수박물관에 있다.
되살아난 은행나무

압각수. 1200년 묵은 은행나무다. 이 고목에도 정축지변의 아픈 역사가 배어있다.

압각수 은행나무 잎. 땅 바닥을 노랗게 물들였다. 오리발처럼 보이는지는 모르겠다.

순흥 읍내에 있는 '순흥 전통 묵집'의 묵밥. 구순의 할머니가 묵을 쒀 묵밥을 만든다.
순흥 청다리에 관한 다른 야사도 내려온다. 소수서원에서 기숙하던 유생들이 청다리 건너 저잣거리에서 기녀들과 놀다 아기가 생겼고, 그 아기를 청다리 밑에 버렸는데 마을에서 아기를 주워 키웠다는 줄거리다. 영주문화연구회 배용호(69) 이사는 “유림을 비하하려는 일제의 거짓말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고 설명했다. 소수서원은 1543년 풍기 군수 신재 주세붕(1495~1554)이 세웠다. 정축지변이 일어나고 86년 뒤 일이다.
영주=글·사진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