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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의 시시각각] “백신 사전주문, 안 급하다”란 궤변

중앙일보 2020.11.24 00:30 종합 30면 지면보기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국제통화기금(IMF)이 선정한 39개 선진국을 경제 규모 순으로 세우면 G7과 한국·호주·스페인이 10위권에 든다. 한데 이 10대 선진국 중 코로나 백신을 제대로 못 챙긴 나라가 딱 하나 있다. 바로 한국이다.
 

10대 선진국 중 한국만 아직 못 챙겨
코로나 확산세인 데다 안정성 입증
약 싸게 사려다 경제 회복 늦어져

최근 95% 안팎의 면역 효과를 거둔 화이자·모더나의 성공 소식이 전해지면서 각국의 백신 확보 전쟁은 더 뜨거워졌다. 유럽연합(EU·26개국), 라틴아메리카(20개국) 등 지역공동체와 국제기구인 코백스(COVAX) 외에 경쟁에 뛰어든 나라는 미국·영국·일본·호주·캐나다 등 27개국. 이들은 18개 업체로부터 64억 회분의 백신을 사전 주문했으며 32억 회분의 구매 옵션까지 받았다.
 
한국은 어떤가. 당국은 “코백스를 통해 1000만 명분, 개별 업체들과의 별도 계약으로 2000만 명분을 확보하겠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다. 코백스는 자력으론 백신을 못 구할 후진국을 위해 만든 국제기구다. 부국들이 추렴한 돈으로 백신을 사서 내년 말까지 184개 가입국 모두가 인구의 20%를 접종할 수 있게 예방약을 골고루 나눠주는 게 목표다. 하지만 미국·러시아 외에 거의 모든 국가가 참여해 가입국 전체 인구는 72억 명을 넘는다. 목표 시한은 내년 말이지만 20%인 14억여 명분을 언제 확보할지 모른다. 웬만한 나라들은 벌써 동분서주해 백신을 사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판에 10대 선진국이라는 한국이 코백스에 크게 의존한다니 이런 낯 뜨거운 일도 없다. 별도 계약을 통한 백신 확보도 아직은 확정된 게 없다. 이대로면 미국·영국·일본 및 유럽 각국은 이르면 다음 달 중순부터 접종을 시작한다. 몇 달 후 이들 나라가 암울한 격리 생활에서 벗어나 활기를 되찾는 걸 우리는 우두커니 지켜봐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당국은 접종 시기를 내년 하반기로 잡으며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유는 셋이다. 첫째, 코로나가 어느 정도 잡혔으며 둘째, 백신의 안전성을 더 봐야 하며 셋째, 장차 약값이 떨어질 거라는 논리다.
 
하지만 이는 궁색한 변명이다. 우선 하루 확진자가 300명 안팎인 현 상황을 보라. 코로나가 잡혔다는 주장이 얼마나 허황한지 절감할 수 있다. 게다가 하루 확진자가 한 자리 숫자인 뉴질랜드·대만·베트남·홍콩도 지난 8월부터 백신 확보 경쟁에 뛰어들었다. 뉴질랜드는 화이자와 150만 회분을 계약했으며 대만도 내년 3월 도입을 목표로 협상 중이다. 이들 방역 모범국이 왜 백신 도입을 서두르겠는가.
 
둘째, 안전성 때문이란 설명도 어색하다. 3상 임상을 마치면 안전성이 입증된 셈이다. 더욱이 백신을 받았다고 바로 접종할 필요도 없다. 지난 7월 국내 한 세미나에서 나온 “백신 투자와 확보는 공격적으로, 접종은 신중히 해야 한다”는 주장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끝으로 싸게 사기 위해서란 해명은 특히 구차하다. 지난 8월 현대경제연구원은 코로나에 따른 연간 경제 손실액을 67조2000억원으로 추산했다. 매달 5조6000억원, 하루 1860억여원씩 날아가는 셈이다. 백신 1회분 가격은 모더나가 25~37달러, 화이자가 19.5달러라고 한다. 2회 접종을 기준으로 2000만 명분, 4000만 회분을 10달러씩 싸게 산들 4400억원쯤 아낄 수 있다. 3일치 손실에도 못 미치는 액수다. 하루라도 빨리 백신을 구해 나라 경제를 정상화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지난 4월부터 ‘백신 민족주의’를 걱정하는 글이 외국 언론에 등장하더니 8월부터 백신 전쟁이 불붙었다. 이때를 시작으로 미국·영국·EU·일본 등에 이어 캐나다·호주 등이 속속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럼에도 한국은 “나 몰라라”였다.
 
도대체 지난 3~4개월 동안 뭘 했는가. 국가의 기본 중 기본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다. 당국은 “내년 후반기 접종” 운운하지 말고 이제라도 백신 확보를 위해 사력을 다해 뛰어야 한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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