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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2035] 정치 ‘8번 문제’

중앙일보 2020.11.23 00:29 종합 28면 지면보기
하준호 정치팀 기자

하준호 정치팀 기자

11년 전 수능 시험장. 내가 선택한 사회탐구 과목 ‘정치’ 시험지 8번 문항의 지문은 이랬다.
 
“시민단체는 시민의 공식적 대표 기구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에 대해 책임을 묻기가 어렵다. 따라서 시민단체는 자신의 ‘활동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노력을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중 홑따옴표 안의 ‘활동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안으로 가장 적절한 것을 고르라는 문제였다.
 
①시민과의 의사소통을 활성화한다. ②자기 조직의 내부 결속력을 강화한다. ③정부 소속 기관의 담당자를 배출한다. ④정부 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을 강화한다. ⑤선거에 후보를 내어 공적인 대표로 진출시킨다.
 
정답은 ①번. 그런데 돌이켜보니 왜 ⑤번은 답이 될 수 없는지 아리송하다. 가장 정당하게 권력을 획득하는 일인데 말이다. 실제 불과 2년 뒤 시민단체 출신의 박원순 변호사가 서울시장이 됐고, 이후 국회의원 중에서도 시민단체 출신 이력을 달고 당선된 이들이 적지 않다.
 
김태년(오른쪽) 더불어민주당,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지난 1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주먹인사를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김태년(오른쪽) 더불어민주당,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지난 1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주먹인사를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공적 대표가 되면 ③, ④번도 쉬워진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한마디면 정부든 기업이든 아연실색한 담당자가 달려오고, 임전무퇴의 장수를 정부로 보낼 수도 있다. ‘개혁’이라는 걸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선출 권력은 곧 선(善)이다. 그들 뒤엔 ‘그들만의 국민’이 있다.
 
이들은 그 권한을 최대로 행사하고 싶어한다. 그러기 위해선 ②번이 중요하다. 내부에서 반론이 나와선 안 된다. ‘원팀’을 유지해야 한다. 악(惡)이 침투하지 않게끔 단단한 방역의 성을 쌓는다. 이탈한 자는 적이다. 그렇게 고립된 채 성 안에선 그들만의 논리가 뿌리를 내린다.
 
그들은 당당하다. 틀렸으면 책임지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높은 수준의 책임이란 게 전장(戰場)에서 빠지는 일이다. 나쁜 결과를 감내하는 건 그들 몫이 아닌 경우가 많다.
 
아, 그래서 ①번이 가장 적절한 답인가 보다. 시민단체뿐만 아니라 정치적 역할을 하고자 하는 누구든 말이다. 의사소통의 대상은 시민이 될 수도, 다른 시민의 견해를 대변하는 다른 정당이 될 수도 있을 게다.
 
지난해 어느 정당에서 펴낸 교과서에도 이렇게 적혀있다. “공적 문제에 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지식과 판단은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혜와 이성적 사고 사이에 있을 뿐 완벽할 수 없다. 민주주의란 그 사이에 있는 다양한 주장들이 공적 토론과 정당한 절차를 통해 불완전하게나마 합의를 형성해 가는 과정을 말한다.”(『당원과 함께, 시민과 함께-더불어민주주의』)
 
이번 주 또 다른 권력기관 출범을 둘러싼 공방이 예고돼 있다. 이미 승부는 정해진 것 같지만 그래도 기대해 본다. 전장에 나갈 선출된 권력들이 ‘가장 적절한 답’을 찾을 수 있기를.
 
하준호 정치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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