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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의 치장은 허영…본질 외면 ‘껍데기 미’는 끔찍하다

중앙선데이 2020.11.21 00:20 712호 26면 지면보기

[미학 산책] 스트로치 ‘바니타스 알레고리’

베르나르도 스트로치의 ‘바니타스 알레고리’. 장미를 든 노부인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다. [모스크바 푸쉬킨미술관]

베르나르도 스트로치의 ‘바니타스 알레고리’. 장미를 든 노부인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다. [모스크바 푸쉬킨미술관]

베르나르도 스트로치(Bernardo Strozzi)라는 화가의 그림 가운데 ‘바니타스 알레고리’(1635)라는 작품이 있다. 여기에는 한 노파가 거울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옆으로 드러나는 그녀의 어깨와 가슴과 목덜미의 피부는 쭈글쭈글하다. 치장한 머리에는 붉은 리본이 두세 갈래로 매어져 있고, 귀에는 진주 귀고리도 세 개나 달려 있다. 이런 그녀 앞에서 한 하녀는 거울을 세워 그녀를 비춰 보이고, 그 옆에 선 하녀는 노파의 머릿결에서 내려온 리본 끝을 왼손으로 쥐고, 오른손으로는 희고 검은 깃털을 귀부인의 머리칼에 꽂고 있다. 그런 치장이 마음에 드는지 두 하녀의 표정은 무척 밝다. 하지만 노파의 얼굴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늙어감에 대한 무감각이 문제
거짓감정은 망상을 먹고 자라
허영·껍질 깨야 ‘미’에 다가가

모든 미는 미의 그림자일 뿐
선하지 않다면 미 추구 안 해
아름다움의 변질도 예상해야

거울에 비친 노부인의 모습은 그녀일 수도 있고, 그녀로부터 도망쳐 온 또 다른 그녀일 수도 있다. 그 모습은 시간과 더불어 사라질 가짜 형상 - 하나의 실루엣일 수도 있다. 그녀는 거울을 응시하며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연분홍 장미를 들고 있지만, 그 체념은 쉽게 가실 것 같지 않다. 그녀의 붉은 뺨에는 루주가 칠해져 있고, 축 늘어진 가슴은 오른편 처녀의 팽팽한 젊음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사실을 사실대로 못 볼 때 허영 생겨
 
화가 스트로치는 어린 시절 교육을 받은 후 17살 무렵 카푸친 교단의 수도사가 됐다. 3년 후 그는 교단을 떠나 세속신부가 됐다. 그는 동시대 작곡가였던 몬테베르디(C Monteverdi)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가 그린 그림에는 어느 것에서나 세상사의 고통과 허영, 헛됨과 겉치레에 대한 응시가 들어 있는 듯하다. 모든 지상적인 것은, 바니타스(Vanitas)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결국 사라진다. 그러니만큼 화장과 장식은 허영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니타스 알레고리’란 허영에 대한 경고다. 그것은 겉치레 외에는 어떤 의미부여의 방식도 배우지 못하고, 그래서 삶의 진실을 자각하지 못한 노인을 보여 준다.
 
대체 꽃과 깃털과 귀걸이와 리본으로 노인이 치장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루주와 화장으로 인간은 무엇을 꾸미려 하고, 머릿결과 옷매무새로 무엇을 보여 주려 하는가? 그림 속 노파는 아마도 평생 부귀와 지위와 권세로 온갖 호사를 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은 것은 무엇인가? 남은 것이 별로 없다면, 그녀가 내세워 온 가치는 피상적인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삶에 비애가 있다면, 그것은 시간과 더불어 덮쳐 오는 헛됨을, 삶의 근본적 덧없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늙음 자체가 아니라 늙어감에 대한 무감각이다. 이 무감각은 젊음의 순간성에 대한 무자각에서 이미 시작된다.
 
스트로치 그림의 제목이 ‘허영의 알레고리’라면, 이 허영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할 때 생겨난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할 때, 대상과 느낌에는 틈이 생겨난다. 이 틈, 이 간극은 실재(reality)와의 간극이다. 현실은 이 간극만큼 우리 곁에서 멀어진다. 그렇듯이 우리의 느낌이나 생각도 실감을 잃는다.
 
이렇게 달아난 실감을 대신하는 것은 가짜 느낌이고 가짜 생각이다. 거짓감정이 감상(感傷)이라면, 거짓사고는 망상(妄想)이다. 사람의 허영은 이 거짓으로서의 감상과 망상을 먹고 자란다. 그리하여 허영에 찬 자아는 쉽게 들뜨고 흥분하며 감격한다. 그러니 감상주의자가 겉모습에 현혹되는 것은 당연하다. 아마도 이들에게 미는 겉보기에 멋지거나 날씬하거나 쿨한 것이 전부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안이함이야말로 참으로 추한 것이 된다. 안이한 감정, 안이한 사고는 추하다. 감정의 타성이야말로 미의 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인가? 아마도 아름다움은 허영과의 싸움에서 ‘겨우’ 그리고 ‘잠시’ 생겨나지 않을까? 어떤 허영인가? 사물의 실체를 가리는 것, 그래서 대상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그 껍질이 실체인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essence)에 다가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가리고 비틀며 왜곡하는 것들이다. 이런 왜곡 속에서 우리는 미로부터 멀어지듯이, 진리나 선으로부터도 멀어진다. 그러므로 미에 다가가기 위해선 이 모든 허영과 싸워야 하고, 미를 가리는 이 모든 껍질을 꿰뚫고 지나갈 수 있어야 한다.
 
『어두운 서고』 표지.

『어두운 서고』 표지.

얼마 전에 내가 본 사진 가운데는 사람의 피부로 제본된 책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피부로 엮어진 책의 기나긴 역사에 대한 한 사서의 탐색을 기록한 책에 대한 서평이었는데, 그 책의 제목은 『어두운 서고(Dark Archives)』였고, 그 사진은 1898년에 만들어진 한스 홀바인(H Holbein)의 ‘죽음의 무도’ 판본을 찍은 것이었다. 진리를 알려면 우리는 사물의 전경(前景)뿐만 아니라 그 배후까지 물어보아야 하고, 빛뿐만 아니라 그 그늘도 살펴야 한다.
 
그러므로 미가 간단할 수는 없다. 아니, 미 자체는 간단하지만, 미의 조건과 그에 대한 태도는 간단치 않을 것이다. 아마도 미는 혹독한 무엇을 전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릴케(R M Rilke·1875~1926)가 ‘두이노의 비가’(1922) 첫머리에서 쓴 것도 그런 뜻이라고 여겨진다.
  
 내가 소리 지른다면, 천사들 가운데 그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 줄까?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겨우 견뎌 내는
 끔찍한 것의 시작일 뿐.
 우리가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에 그렇게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천사는 끔찍하다…
 
시인이 적은 대로, “아름다운 것이 끔찍한 것의 시작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das Schöne ist nichts als des Schrecklichen Anfang)”이라면, 우리는 아름다움 앞에서 끔찍한 무엇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름다움을 누리려면, 그 근거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아름다움과 그 토대, 그 배경과 테두리를 예감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추이고 허영이기 때문이다.
  
미의 껍데기서 ‘선’ 가능성 상상해야
 
그러므로 아름다움은 늘 아름다울 수 없다. 만약 한결같다면, 아름다움은 우리의 물음 속에서 아름다운 것으로 드러날 것이고, 지금 여기의 현실 속에서 이 현실의 검증을 견뎌낼 때, 아름다울 것이다. 미의 향유는 그다음에 가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름다움의 향유 속에서도 그 변질 가능성까지 예상해야 한다. 미와 미의 한계를 헤아리고, 그 한계를 거부하며, 그 한계를 가로질러 기존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 - 한계부정적이고 한계횡단적이며 한계초월적인 에너지야말로 아름다움의 이름이다. 이것은 마치 문화의 가능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문화를 억압하고 훼손해 온 어둠의 기나긴 역사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가 만나는 아름다움도 완전하거나 항구적이지 않다. 그런 점에서 모든 미는 미의 그림자일 뿐이다. 미란 잠시의 사건이고 순간의 해프닝이다. 그래서 헛것이고 껍데기이며 허깨비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런 껍데기에는 진실의 부스러기도 들어 있다. 미의 이런 껍데기에서 우리는 미의 온전한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온전한 가능성, 그것은 선(善)의 가능성이다. 그런 점에서 미는 곧 선이다. 선하지 않다면, 우리는 미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의 존재와 선에 대한 갈망은 하나다. 이러한 미의식은 추에 대한 의식으로 이어져야 한다. 미의식이 추에 대한 자각과 이어져 있듯이, 미에 대한 자각은 선에 대한 갈망과 결부되어 있다.
 
문광훈 충북대 독일언어문화학과 교수
충북대 독일언어문화학과 교수. 고려대에서 독문학을 공부한 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독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수영론, 김우창론, 페터 바이스론, 발터 벤야민론 등 한국문학과 독일문학, 예술과 미학과 문화에 대해 20권 정도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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