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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명절 보다 더 큰 연례 가족 행사, ‘사돈네 김장날’

중앙일보 2020.11.18 07:00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66)

딸의 시댁은 연중행사인 명절보다 더 큰 행사가 김장하는 날이다. 온 가족이 빈 김치통을 들고 모인다. 김치 냉장고에 들어가야 하는 통만 50개 넘게 줄을 선다. [사진 wikimedia commons]

딸의 시댁은 연중행사인 명절보다 더 큰 행사가 김장하는 날이다. 온 가족이 빈 김치통을 들고 모인다. 김치 냉장고에 들어가야 하는 통만 50개 넘게 줄을 선다. [사진 wikimedia commons]

 
김장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요즘은 절임배추가 있어 더 쉽게 김장을 할 수 있고, 때론 사서 먹는 것이 더 맛있고 편한 세상이다. 그래도 이맘때쯤 시장에 높이 쌓인 배추를 보며 김장을 해야 한국인인 것 같아 다음 주쯤엔 나도 다섯 포기 정도 해볼까 계획 중이다.
 
집을 방문한 딸아이가 차 트렁크에서 마술하듯 통을 꺼내고 또 꺼낸다. 차곡차곡 쌓아서 갖고 온 지저분한 김치통이 10개가 넘는다. 먹다가 만 것, 배추 대가리만 담긴 것, 국물만 남은 것 등등. 나는 먹을 만한 묵은지는 추려내고 나머지는 땅을 파서 묻는다. 우물가로 갖다 날라 물을 담아 한참 우려내고 깨끗이 씻어 차에 다시 실어준다. 딸은 옆에서 거들며 아파트에선 이렇게 물을 쏴 하게 틀어놓고 시원하게 씻을 수 없었는데 속이 확 풀린다며 깔깔 웃는다.
 
‘이 인간이 엄마를 부려먹으면서 웃음이 나오냐. 기도 안 찬다.’ 말로는 핀잔하면서도 조수 짓을 해주는 이유는 주말이면 시댁으로 김장하러 가기 때문이다. 그때 가서 녹초가 될 터이니 전반전을 조금 거들어 주는 셈이다.
 
딸의 시댁은 연중행사인 명절보다 더 큰 행사가 김장하는 날이다. 온 가족이 빈 김치통을 들고 모인다. 김치 냉장고에 들어가야 하는 통만 50개 넘게 줄을 선다. 명절은 1박2일이지만 김장하는 날은 2박3일 코스다. 그날은 온 가족 먹거리는 물론 주위의 독거노인에게도 김장을 이리저리 나눈다. 나는 그분이 공동체 사랑을 실천하고, 함께 어우러져 사는 세상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부처라고 생각한다.
 
모이는 며칠 전부터 직접 농사지은 배추 밑동을 잘라 옮기고, 또 반으로 잘라 소금에 절여 놓는다. 이미 전날 새벽에 바닷가 어시장에 가 양념에 넣을 생갈치와 젓갈을 사다 놓았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나서야 자식들이 하나둘 나타난다. 한쪽엔 삶은 돼지고기에 보쌈김치가 술과 곁들여지고, 한쪽에선 부지런히 양념 섞어 김치통에 담아 줄을 세운다. 돌아갈 때 자기가 갖고 온 통만 잘 찾아가면 된다. 소포장에 바로바로 먹고 없앨 수 있는 마트 음식에 길든 지금 세대에게 그 일은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다. 어머니의 맛보다 신의 맛이 더 좋으니 말이다.
 
김장으로 모이는 며칠 전부터 직접 농사지은 배추 밑동을 잘라 옮기고, 또 반으로 잘라 소금에 절여 놓는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나서야 자식들이 하나둘 나타난다. [사진 pixabay]

김장으로 모이는 며칠 전부터 직접 농사지은 배추 밑동을 잘라 옮기고, 또 반으로 잘라 소금에 절여 놓는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나서야 자식들이 하나둘 나타난다. [사진 pixabay]

 
요즘은 가족이 남보다 더 먼 이웃인지라 그날은 가족 화합의 날이기도 하다. 어색한 일도 자꾸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당연한 일상이 된다. 딸에게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니 “힘들지, 엄청 힘들어. 그런데 작년에도 제 작년에도 그러셨거든.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각자 해 먹으라고. 이번 해에도 병원 갈 일이 많아 김장은 안 하겠지 생각했는데 소집 명령이 떨어지니 건강을 찾으신 것 같아 감사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달려가야지. 어머니 안 계시면 하고 싶어도 못 할 일이잖아” 한다.
 
모든 건 마음 먹기 나름인 것 같다. 처음엔 투덜거리던 딸이 어느새 가족을 화합하고 서두르는 마음 씀이 예쁘고 기특하다. 대가족이 양념 통에 둘러앉은 모습이 폰으로 송출된다.
 
김장하는 모든 엄마는 밤새 배추를 뒤적이며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꾹꾹 절인다. 아직은 무엇이든 자식에게 해주고 싶은 존재 이유도 된다. 언젠가 부모가 떠나도 그때의 묵은 정은 훗날 힘들었지만 재밌고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할 것이다.
 
 
방송에서 들은 재밌는 김치찌개 이야기로 사돈네 김치 맛을 미리 상상해 본다. 묵은김치로 만든 김치찌개는 가장 쉽고 레시피 없이 만들 수 있는 민족 음식이다. 어느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아들이 뭘 잘 먹는지 물었다. 아들이 김치찌개를 가장 좋아한다는 며느리 대답에 시어머니는 속이 상해 빈정거리며 말했다. “얼마나 먹을 것이 없으면 개나 소나 다 만들 수 있는 김치찌개를 좋아하겠냐.”
 
며느리는 민망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그때 아들이 버럭 하고 나서서 엄마에게 소리 질렀다. “어머니, 개나 소나 다 하는 그 음식만 20년을 질리도록 먹다가 집 떠나니 그 음식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되었어요. 당장 사과하세요. 가장 맛있고 정성스레 음식을 만들어 주는 셰프 나의 부인과 김치찌개에요.” 현명하고 재치있는, 밉살스런 아들 말이 잘 익은 김장김치 맛같이 감칠나게 들린다. 추려낸 남은 김치로 김치찌개나 한 냄비 해놓아야겠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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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옥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필진

[송미옥의 살다보면] 요양보호사 일을 하다 평범한 할머니로 지낸다. 지식은 책이나 그것을 갖춘 이에게서 배우는 것이지만, 인생살이 지혜를 배우는 건 누구든 상관없다는 지론을 편다. 경험에서 터득한 인생을 함께 나누고자 가슴 가득한 사랑·한·기쁨·즐거움·슬픔의 감정을 풀어내는 이야기를 쓴다. 과거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이웃과 함께 남은 인생을 멋지게 꾸며 살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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