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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생명 존중 사회’라면 살릴 수 있는 태아는 살려야

중앙일보 2020.11.18 00:26 종합 33면 지면보기
박용원 전 세브란스병원장·산부인과학회 낙태법 특별위원장

박용원 전 세브란스병원장·산부인과학회 낙태법 특별위원장

형법과 모자보건법의 낙태 조항을 개정하면 개정법이 시행되는 곳은 결국 의료 현장이다. 여성의 건강과 태아의 생명 보호가 직업윤리인 산부인과 의사들의 의견을 법 개정 과정에 반드시 반영해야 하는 이유다.
 

여성 건강과 태아 생명 모두 소중
법에 ‘낙태 진료 선택권’ 보장을

그러나 일각에서 낙태죄를 없애는 것이 마치 여성을 위하는 것처럼 주장한다. 하지만 낙태 실상을 누구보다 잘 아는 현장 의사들은 크게 우려한다. 여성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는 법으로 어떻게 여성의 권리를 지키겠다는 것인가. 낙태해서 더 건강해지는 여성은 없다. 낙태에 대해 의학적인 고려 없이 무조건 허용하자는 주장은 여성을 위험하게 할 뿐이다. 수술로든 약물로든 태아와 태반 등이 여성의 몸 밖으로 나와야 낙태다. 따라서 태아의 장기와 뼈가 형성되는 임신 10주 이후에는 자궁 출혈과 손상 위험이 증가하며 다음 임신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임신 10주부터는 태아 검사로 원하는 아이를 골라 낳는 우생학적 사유의 낙태가 벌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정부 안처럼 임신 14주 이내에 제한 없이 낙태를 허용하면 충분한 상담과 지원 제도로 살릴 수 있는 아기를 안타깝게 포기하게 될 위험이 높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생명 존중 사회인가.
 
극초미숙아를 살리려는 신생아 담당 소아과 의사들의 헌신으로 임신 24주 이내에 태어난 아기들의 생존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한 명의 태아라도 더 살리려고 노력하는 의사들은 생존 가능성이 있는 태아의 낙태를 허용하는 법을 반대한다. 만약 정부 안대로 임신 24주 이내에 모든 낙태가 24시간의 숙려만으로 허용되면 살아서 태어난 아기의 생명을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최근 서울고등법원은 낙태해 태어난 아기를 숨지게 한 의사에게 낙태죄는 무죄로 판결했지만, 살인죄와 사체손괴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부모는 태아가 죽기를 원하고 의사는 살인할 수 없으니 이렇게 태어난 아기들은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생존 가능한 시기에 낙태돼 살아난 아기들의 양육뿐 아니라 그냥 뒀으면 별문제 없이 만삭에 태어났을 텐데 조산하는 바람에 생긴 아기의 합병증 치료까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정부와 국회는 낙태 허용 임신 주 수를 정하기 전에 임신 24주 이내에 태어난 아기들이 어떻게 살아나는지 의료 현장을 한 번이라도 가보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낙태죄 위헌 소원 결정문에서 “태아도 헌법상 생명권의 주체가 되며, 국가는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따라서 낙태 처벌 조항을 없애자는 주장은 헌재 결정을 위반하고 국가가 태아의 생명 보호 의무를 포기하자는 것이다.
 
정부는 모자보건법 입법안에 ‘임신·출산 종합상담기관’을 운영한다고 했다. 하지만 상담의 목적이나 상담사의 자격이 없어 상담 사실 확인서 발급을 위한 형식적인 상담이 될 우려가 있다. 위기 임신을 한 여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과 지원을 제공하는 상담이 돼야 한다.
 
의사의 낙태 진료 선택권은 반드시 법으로 보장해야 한다. 사회·경제적 사유에 따른 낙태를 거부하는 의사에게 부당한 의무를 부과하면 안 된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개정법이 시행되면 법을 지키며 낙태를 하든 안 하든 당당하게 진료하고 싶다.
 
여성들이 어떤 상황에서 임신했더라도 불이익을 받지 않고 존중받는 사회가 돼야 낙태 위기의 태아를 살릴 수 있다. 산부인과는 낙태하는 여성을 처벌하자는 게 아니다. 살 수 있는 태아를 살리고 불가피하게 낙태해야 하는 여성은 안전한 의료 시스템 안에서 권리를 보장받으면서 낙태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이번 낙태 관련 법 개정이 과거의 ‘낙태 공화국’ 오명을 벗고 생명 존중 사회로 진일보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박용원 전 세브란스병원장·산부인과학회 낙태법 특별위원장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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